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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롬나 Feb 29. 2024

고집불통 인간

귀여운 할머니가 꿈이예요

어렸을 때부터 하나에 꽂히면 누가 뭐라 해도 꼭 해야 고집이 있었다. 흔히 말하는 똥고집이라 불리는 내 성격은 도덕적 관념으로 봐서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어른들이 좋아하는 예의바른 사람이었다. 다른 한쪽으로 봐서는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고집불통의 '불통' 인간이었고, 한번 꽂히면 습자지처럼 잘 흡수가 되어 버리기도 했다.


매일이 무기력하고 재미없는 고등학교 생활은 왜 해야 하는지 모르던 시절, 나는 성적도 중간이었고 교실에서는 있는듯 없는듯 제일 끝 구석자리에 앉아 있는 존재감 없는 아이였다. 

그 때 만난 내 짝꿍은 한 달에 패션 잡지 6권 구독하며 매일 패션잡지와 함께하는 아이였고, 내 진로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재미없던 학교생활이 패션 잡지를 보는 순간 반짝거리는 세상으로 변했고, 매달 바뀌는 트렌드를 패션 에디터가 다양하게 소개해주는데 잡지 한 장씩 넘겨보는 게 아까울 정도로 재밌었다. 패션 잡지의 각주에 달린 작은 글자까지 모조리 다 읽던 시절, 잡지를 읽고 느낀 점을 정성스럽게 적어서 엽서로 보낼 때마다 매번 소정의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게 너무 행복하고 고등학교 시절 나만 아는 소소한 비밀이자 낙이었다. 짝꿍은 패션 잡지 에디터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동기화가 이루어지듯이 나도 패션 잡지에 흥미가 생겨서 자연스럽게 패션 디자이너로 진로를 잡았다. 정확히는 패션 분야에 어떤 분야가 있는지도 잘 알지 못한 채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분야라서 예술병에 걸린 것처럼 점점 더 빠져들었다. 무엇보다 뭐든지 쉽고 자유롭게 하는 짝꿍을 보면 나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생활을 패션잡지와 한 몸처럼 지내며, 대학교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한량처럼 자유로워보이던 짝꿍은 알고 보니 아주 현실적이고 확실한 진로 계획이 있었다. 대학교를 이탈리아로 유학을 갔고 부유했던 집안 덕분에 걱정 없이 탄탄대로의 인생을 보내는 것 같았다. 그에 반면 평범했던 우리 집은 살벌한 입시미술 학원 비용부터 비싼 디자인 대학교 첫 등록금까지, 빠듯하게 마련되는 현실을 보면서 더욱더 차갑게 느껴졌다. 그때 더 빨리 알아차리고 내가 뭘 원하고 내 분수에 맞는 게 어떤 건지 찾았어야 했다. 하지만 도전하는 게 너무 무서워서 대학교를 꾸역꾸역 졸업을 했고, 패션 디자인 분야는 서울 아니면 일자리가 거의 없을 정도로 찾을 수 없었다. 여러 회사들을 전전하며 다녔지만 이름만 디자이너였고, 현장에서 보조하는 물품 업무를 담당하기 바빴고 디자인 일은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야근을 밥 먹듯이 했고, 열정 페이에 심신은 쇠약해져만 갔다. 28살, 늦은 나이에 부푼 꿈을 안고 서울 상경을 했지만, 부산의 경력은 전혀 인정해주지 않았고 알바보다 못한 시급을 받고 열정 페이로 가스라이팅 당하며 지내게 되었다. 영양 결핍으로 피부질환과 불규칙한 식사와 야근으로 식도염, 스트레스성 위염을 항상 안고 살아야 했다. 


나는 지극히 안정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안정이 보장 되지 않는 예술 분야의 욕심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하거나 열정을 더 가져야만 할 수 있는 분야였기에 나는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사람이 되어갔다. 전문직으로 일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하게 되었고 결국 늦은 나이에 안정적인 일로 직종을 바꾸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일을 해보고 느낀 점은 나는 다른 분야에서 일을 해도 여전히 디자인 분야에 눈을 뗄 수가 없었고 한 발짝 물러나서 보니 더 동경을 하게 되었다. 전시회나 아트북을 챙겨 보며, 언젠가는 나도 저기에 내 이름을 새길 수 있기를 꿈꾸고 있다. 


어렸을 때는 진로와 꿈을 왜 같은 방향으로 생각했을까, 후회한 적도 있다. 대학교를 졸업하면 안정적인 직업이 보장 되는 여러 진로를 좀 더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다못해 대학교 때 복수전공이라도 하며 도전을 해볼 걸 후회한 적도 많았다. 


결국 나는 하고 싶은 걸 꼭 해야 하는 고집불통 같은 단단함을 역이용해서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해보기로 결심 했다. 


반드시 이루어 내야 하는 목표가 생기게 되니 오랜만에 가슴 한쪽이 뜨거워졌다. 길을 돌고 돌아서 남들보다 몇 배는 늦었지만, 좋아하는 것을  계속 연구해보며 언젠가는 내 마음에 쏙 드는 걸 찾고 싶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명언을 되새기며, 하고 싶은 걸 하며 행복하게 사는 귀여운 고집불통의 할머니가 되기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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