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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롬나 Jan 02. 2024

국물전문가

은밀한 취미생활

취향탐구가

취향이 없는 줄 알았는데 찾았고 이제는 가장 중요해졌다.    




내 살의 8할은 아마 국물 때문일 것이다.     


이상하게 어렸을 때부터 우리집은 집밥만 먹게 했고 음식을 돈 주고 먹어본 기억이라고는 김밥천국이나 분식집이 다였다. 

그래서 항상 내가 못 먹은 음식들에 대해 호기심이 많았고, 그 중에서 부산에서 친근하게 자주 볼 수 있는 국밥이 가장 궁금했다. 못 먹게 하는 건 아니었지만 왠지 국밥은 어른이 되어야 꼭 먹을 수 있는 음식처럼 느껴졌다.      


대학교 때부터는 미성년자라는 딱지를 처음 떼고, 자유롭게 음식이며 술을 내가 선택해서 먹을 수 있어서 신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숨만 쉬어도 하얀 입김이 새어나오던 어느 추운 겨울날, 친구 따라 국밥을 처음 먹어본 날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펄펄 끓는 뚝배기에 국물이 가득 들어있고, 공기밥이 같이 나왔다. 어떻게 먹어야 할지 머뭇거리고 있을 때, 친구가 맛있게 국밥 먹는 방법이 있다며 알려주기 시작했다. 먼저 뜨끈하고 뽀얀 국물에 빨간 다대기를 취향껏 힘차게 풀고, 부추를 가득 넣고 새우젓도 살짝 넣어준다. 그리고 얼큰한 맛을 위해 청양고추 하나를 가위로 쫑쫑 썰어서 넣어준다. 숟가락 가득 하얀 쌀밥과 국물을 퍼서 두툼하게 썰어진 고기 한 점과 새우젓을 올려 입안에 가득 넣어줬다. 


탄수화물의 포만감과 따끈하고 얼큰한 국물, 짭쪼롬한 새우젓과 두툼한 고기의 식감까지 완벽히 페어링 되면서 귓가에 샹투스가 울려퍼지는듯 했다.      


무엇보다 나는 국물에 제격일수 밖에 없는 선천적인 이유도 있었다. 알고보니 집안 가족들 모두 국물 요리를 좋아했고, 1년 365일 집 밥에 무조건 국이나 찌개가 항상 있었다. 입천장이 남달리 두껍고 튼튼해서 아무리 뜨거운 국물이나 음식이 나와도 입으로 들어가면 요령껏 빠르게 먹을 수 있는 기술이 본능적으로 발달해 있었다. 


내가 국물을 빠르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따라 먹던 친구들이 뜨거운 온도에 화들짝 놀라며 내 입은 100도 전용이냐며 경이로운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그때 이후로 한동안 주3회 이상 국밥을 먹었고, 나의 국물 사랑이 시작되면서 친구들에게 아재입맛이라는 놀림까지 받게 되었다.      


음식에 열려있는 친구들 덕분에 낮에도 국밥에 소주까지 마스터할 수 있었다. 뜨끈한 국물에는 깔끔한 목 넘김이 좋은 소주 한잔, 고추 한 입까지 먹어주면 그야말로 기승전 얼큰 깔끔 마지막은 매콤으로 1타 3피의 조화로움을 즐길 수 있었다. 


저녁에 먹는 술이 얼큰하게 취해 하루를 회고하는 느낌이라면, 낮에 먹는 술은 밥과 먹는 반주 느낌에 적당히 취기가 오르기 전에 마무리해야 했기에 아쉬운 마음이 커져 더 생각이 났다.      


그 뒤로 감자탕,곰탕,설렁탕,소고기국밥,찌개,전골 등 모든 국밥, 탕 종류는 다 섭렵하며 다녔던 것 같다. 

덕분에 국물의 염분들이 쌓여 내 몸의 일부가 될 정도로 살도 급진적으로 쪘다.     






그 뒤로 나는 대학교의 전공과 약간의 씨름을 하고 사회생활의 여러 고난을 겪으며 방황하기 시작했다.

먹고 살기 위해 고군분투할수록 자존감은 떨어지고, 그에 비례하며 비교하는 나 자신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나는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내 심지를 두껍게 키워나가기 위해 애썼다.


살짝 한 눈을 팔며 재밌는 걸 찾고 내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하니, 조금씩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오로지 일에만 몰두하던 내가 일상과 일에 어느 정도 경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일에 의미를 두지 않고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할수록 내 퍽퍽한 삶이 조금씩 말랑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여유가 생기니 내가 사색하는 걸 좋아하고 나만의 세계에 빠져 상상하는 것도 좋아한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일상을 견디며 어떤 목표와 재미 설렘 행복에 대한 단상들이 흐려져 있을 때 즈음에, 도서관에서 우연히 책들을 보게 되면서, 좋아하는 것들이 조금 더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어떠한 추천이나 지식 없이 그냥 끌리는 제목과 의식의 흐름대로 책들을 읽게 되었다.

그 시작은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등 여러 일본 소설들과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가의 책이었다. 가볍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어서 친근하게 다가왔고 그 뒤로 다양한 소설들을 읽으며 점점 책을 가까이하게 되었다.     

혼자서 책 읽는 건 좋아하지만 아직 남들과 어울리는 건 서툴기만 했다. 대외활동이라고는 전혀 해보지 않았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얼마나 재밌을지 환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부푼 마음을 안고 집 주변의 대학가에서 독서모임의 일원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한 달에 한 번 모임을 진행했고, 나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을 하며 열의를 보였지만 일시적으로 만든 모임이라 어느새 흐지부지 없어지게 되었다.     

그 뒤로 한참 고민을 하다 어떤 용기가 생겼는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내가 독서 모임을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책을 직접 고르고 원하는 장소에서 모임을 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자 원하는 모임의 형태였다.

같은 회사를 다니고 책을 좋아하던 친구에게 내가 원하는 독서모임의 방식에 대해 기획한 프레젠테이션을 보여주며 함께 운영하자며 설득을 했다. 친구가 함께 한다는 결정이 나자마자 블로그에 모임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매일 모임 가입자가 있기를 댓글을 확인하며 애타게 기다렸다.      

처음으로 모임 가입을 원하는 연락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직장인 남자였고 수줍게 모임의 방식에 대해 질문을 하였다. 인문학과 에세이, 심리학에 관심이 많은 분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회원은 소설을 많이 좋아하는 교도관이었다. 교도관으로 일하며 혼자 버텨야 하는 야간 근무 시간에 책 한권도 거뜬히 다 읽는 다독가셨다. 그렇게 처음에는 4명으로 시작하여 시간이 지나 16명까지 늘어나기 시작했다. 작은 스터디룸을 빌려 정해진 시간대로 진행하려 했지만, 생각보다 처음의 수줍음은 온데 간데 없이, 열띤 토론을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를 때도 많았다.     


독서라는 매개체를 통해 사람들을 만나 자기 생각을 말하고, 자신의 가치관부터 경험까지 들을 수 있게 되니 짧은 시간에도 아주 깊게 친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모임을 진행 하는 시간만큼은 소극적이었던 내가 자신감 있고 활발해지는 리더로 변신하는 모습에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걸어 다니면서 하는 독서"     


독서 모임이 끝나고 나면 여러 사람들의 생각과 각자의 인상 깊었던 곳을 살펴보면서 책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고, 저절로 책을 한번 더 꼼꼼하게 읽은 것처럼 내용들이 정리 되는 게 참 좋았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면 한가지의 생각만 하게 되지만 10명의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게 되면 10가지의 생각들을 가지게 된다는 걸 독서모임을 진행하면서 점점 깨닫게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독서 모임을 아쉽게 잠정적으로 중단하게 되었지만, 한 번도 쉬지 않고 7년이라는 시간 동안 모임 운영을 하였던 시간들이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있다.

셀 수 없이 수많은 인연들을 만나고 소중한 추억도 쌓게 되는 그 시간은 내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을 주는 시기였다.      


일을 하며 한 번도 즐겁거나 뿌듯한 성과를 이루어내지 못 한다는 자괴감에 빠질 때쯤, 독서모임을 하며 스스로 뿌듯함을 느끼며 인정을 받고 많은 응원들이 인생을 값지게 살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비록 독서모임도 너무 일처럼 열심히 해서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지만, 살면서 가장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지내던 시기였다.      


좋아하는 것이 뭔지도 모르던 내가 점점 취향의 폭이 넓어지면서, 싱그러운 잎들이 하나씩 자라나듯 풍부한 경험들을 하며 성장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계속 내 취향을 탐구하면서 행복한 일상들이 가득한 아름다운 정원을 정성스럽게 가꾸어 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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