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어디까지 해봤니?
초등학교 4학년 때 , 조그맣고 예쁘게 생긴 친구가 전학을 왔다.
내가 키 큰 순위로 1번이라면, 그 친구는 키 작은 순위로 1번이었다.
대략 20cm 넘게 키 차이가 났는데, 그 친구가 항상 나와 함께 다니며 목을 기린처럼 길게 뻗어 다녔던 기억이 있다.
우리가 어떻게 친해졌는지 아직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언제부터인가 같은 미술학원을 다니고, 마치고 나면 공부 학원을 이어서 같이 갔다. 짧게는 반나절을 길게는 하루 종일 주 5일 이상을 붙어 다니니 안 친해질 수가 없었다.
평상시에 그 친구의 학교 생활은 조용했고, 항상 책을 읽는 친구였다.
조금 친해지면, 푼수처럼 말도 많이 하고 솔직하고 똑똑하지만 잘난 척이나 남의 험담을 하는 친구가 아니라서 더 좋았다.
항상 엄마는 나에게 책을 읽으라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많이 이야기했지만, 정작 책에 관심이 전혀 없어서 저 친구는 뭐가 재밌어서 저렇게 책을 쉬지 않고 읽는지 항상 신기했다.
그 친구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었다.
만화책,SF 소설책,로맨스 소설, 일본 작가 소설,역사소설 등 그 친구가 읽는 책이라면 나도 어떤 건지 점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게 계기가 되어서 좋아하는 일본 작가가 생겨났고, 그 한 해 동안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작가들의 책을 거의 다 읽었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하루는 친구가 새벽에 너무 사이다가 마시고 싶어서, 집에서 혼자 나와 24시간 대형마트에 갔다 왔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고작 초등학생이 새벽에 용감하게 집 밖을 나간다는 것 자체가 너무 충격적이고 신선했고, 혼자서 무언가를 한다는 개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나는 혼자서 무엇을 할 때마다 주변 눈치를 보고 주눅이 들어서 자연스레 힘이 없는 단어라고 줄곧 생각해왔던 것 같다. 어디를 가고 싶고, 어떤 것을 경험해보고 싶어도 나는 혼자라서 못하겠지 하면서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포기한 적이 많았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집 앞에 작은 학원에서 일본어를 배운다고 했다.
그 당시 나는 새로운 경험에 한참 빠져있던 터라, 친구를 따라서 일본어를 배우게 되었다.
친구는 워낙 일본 책,영화, 만화를 좋아해서 이해력도 빠르고 남달리 우수한 성적을 냈다. 반면 나는 일본어 글자가 예뻐서 시작하게 되었다는 핑계를 댔지만, 그저 친구를 따라서 한번 경험 해보고 싶은 마음이 커서, 이해력은 무슨 기초 실력도 형편없었다.
경험과 취향, 스스로의 가치관이 생기게 된 계기는 그 친구의 영향이 가장 컸던 것 같다.
성인이 되어서도 동남아시아 외진 곳에 혼자 용감하게 다녀오고, 다이빙 자격증도 따고 전국의 산들을 암벽타기 하며 활동 범위가 점점 넓어지는 걸 보면서, 매사에 유연하고 자유로운 친구의 모습을 항상 동경해왔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의 가치관과 취향이 생겨나면서부터는 혼자 무엇을 한다는 행위에 자유로운 경험이라는 단어가 보너스처럼 더해져, 눈치 보지 않고 혼자 놀기의 달인이 되어갔다.
나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 주변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었다.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으면 좋은 사람이 되고, 나쁜 사람들이 있으면 바로 나쁜 사람이 되어 버리는 습자지 같은 사람이었다. 스스로 주변 환경의 영향을 특히 많이 받는 다는 것을 처음 인식했을 때, 많이 좌절하고 계속 깨부수려고 노력했지만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던 터라 맘처럼 쉽지 않았다.
그때 나는 되 든 안 되든, 다이어리에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곳, 나의 도전할 목록들을 낙서처럼 끄적이게 되었고, 그것들을 용기 내어서 천천히 도전해보게 되었다.
사소한 버킷 리스트들이었지만, 나에게 혼자서 뭔가 해낸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버킷리스트들을 이뤄낼 때마다 하나씩 도장 깨기 하는 것처럼 너무 재밌고 점점 성취감도 생겨났다.
화려해보이기만 하던 빈 껍데기만 채우다가 속이 꽉 찬 알맹이 하나를 어렵게 수확해나가는 기분이었다.
대망의 첫 번째 혼자 놀기 시작은 영화보기였다.
고등학교 입시대비를 하던 시절,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고 1초 만에 평가 받고 다시 그림 그리기를 반복하던 때였다.
반복되는 평가와 질책에 지쳐서, 다시 일어설 힘도 열정도 없이 모든 에너지가 바닥이 난 상태였다.
갑자기 좋아하던 신민아가 처음으로 출연하는 영화가 개봉했다는 소식이 생각이 났다.
저 영화를 꼭 한번 봐야지 생각만 하던 때에, 예전 같으면 같이 보러갈 누군가를 어렵게 찾으며 기다렸다가 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나의 기력이 지금 당장 저 영화를 보지 않으면 힘을 낼 수 없다고 시위를 하듯, 나는 어느새 영화관에 이끌려가 혼자 티켓을 끊고 있었다.
오후 2시 미술학원에는 조퇴를 하고, 누가 나를 알아보기라도 할까봐 몰래 영화관에서 영화가 시작하기만을 기다렸다. 혼자서 처음 영화 보는 것은 나에게 정말 큰일이라서 너무 떨렸고, 영화관 자리에 앉기까지 엄청 쭈뼛거리며 온갖 눈치를 다 보며 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팝콘과 음료수를 마시며 영화가 나오기 전 광고를 볼 때, 나는 혼자 어색하게 손만 만지작거리며 영화가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막상 영화가 시작하자 혼자 크게 웃기도 하며 박수도 치고, 펑펑 울기도 하고 주변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자유롭게 내 감정을 표출하며 몰입하는 순간이 행복했다.
잔뜩 억압되어 찌그러져 있던 내 안의 감정들이 다시 팽팽하게 열렬히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혼자 놀기는 여행하기였다.
어렸을 때부터 꿈꾸던 기차 여행이 항상 로망처럼, 가슴 한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유유자적하게 기차를 타면서 시시각각 바뀌어 가는 풍경들을 감상도 하고, 탁자 위에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한편의 풍경 영화를 보듯 여행 하는 것이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었다.
20대에 내일로 여행을 시작으로 기차 여행 로망을 하나씩 이뤄나갔다.
순천,여수,군산,영월,서울,제주,경주 등 여러 도시들을 다니며 자칭 숨은 여행 고수가 되어갔다.
혼자 여행을 하면서 꼭 하는 나만의 루틴이 생겼다.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재래시장을 방문하며 푸근하고 활기찬 분위기를 느끼고, 게스트하우스의 특징들도 파악하고, 지역 특색의 관광 상품을 기념으로 사고 가장 유명한 음식도 맛보며 온전히 여행을 제대로 즐기는 것이다.
유일하게 아직 혼자 하는 것 중 아직 망설이는 것이 술 마시기인데, 여행가서 혼자 술을 마시는 것은 뭔가 더 낭만적이고 처음 본 사람들과도 절친이 될 수 있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도 있어서 한번쯤 해 볼만 했다.
그리고 그 뒤로도 혼자 전시회보기, 혼자 콘서트 관람, 혼자 카페 가기, 혼자 밥 먹기,혼자 인생 네컷 찍기 등 여러 혼자 하기 레벨들을 만렙으로 채우고 있는 중이다.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혼자 캠핑 해보는 것이 꿈이다.
혼자 무엇을 한다는 것은, 자유롭게 눈치 보지 않고 나의 의지와 취향대로 맛보고 즐기는 것이 큰 장점이라면, 한편으로는 그만큼 책임감도 따르고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위험한 순간들을 경험하기도 했다.
혼자 여행을 가서 아름다운 풍경이나 맛있는 것을 먹을 때 누군가와 지금 이 감정들을 나누면 너무 좋겠다 싶은 순간들이 존재했고,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가서 어딘가를 같이 가거나 무엇을 하고 싶어도 서로 잘 맞지 않을 때 눈치만 보며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있었다.
그만큼 혼자, 혹은 함께 하는 것의 장단점들이 극명하게 존재하기에 싱글과 기혼자들이 서로를 부러운 눈빛으로 그리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정답이 없기에, 앞으로도 나는 계속 마음이 이끌리는 데로 혼자 놀기의 만렙을 찍으며 계속 성장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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