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로 떠난 책 여행
02로 시작하는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 같으면 자동으로 거절 버튼을 눌렀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추가로 당첨이 되었다는 반가운 전화였다.
얼마 전 민음사 출판사의 북 클럽에 가입을 했다. 치열한 가입 전쟁으로 서버가 다운되고 반나절의 기다림 끝에 겨우 가입을 했다. 가입비를 내고 본인이 고른 책들과 출판사에서 편집한 한정판 책들, 그리고 여러 행사와 커뮤니티까지 너무 재밌어 보여서 가입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추가로 당첨되었다는 연락은 파주 출판단지에서 하는 패밀리 데이라는 행사였다. 민음사 출판 건물에서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책을 구입할 수 있었고, 자신의 책도 기부하면 포인트로 책을 살 수도 있었다. 이번 해에는 특별히 멀리서 오는 사람들을 배려해서 민음 출판사 건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지지향이라는 숙소를 반값에 제공해주는 혜택이 생겼고, 멀리서 오는 사람들의 거리 기준으로 당첨 확률이 높았다. 지방에서 오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여러 섬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는 사람들도 많았기에 지원만 하고 당첨 되지 않았구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안 될 거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파주에 가면 해보고 싶은 것들을 나도 모르게 찾아보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추가 당첨이 되니 망설이게 되었다, 부산에서 파주까지 가는 장거리 시간, 비용, 체력이 괜찮을까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망설일 시간은 부족했고, 1시간 뒤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파주 출판단지는 어렸을 때부터 꼭 가보고 싶은 도시였다. 푸릇푸릇한 나무들과 낮은 건물들이 모두 모여 있는 출판도시였고, 건축 관련 상을 받은 건물들도 많아서 볼거리도 다양했다. 무엇보다 지지향이라는 건물의 도서관은 높은 천장까지 책이 진열되어 있고 마음껏 여러 책들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라서 꼭 가보고 싶었다. 지지향에서 숙박을 하면 무려 책을 5권이나 무료로 빌려볼 수 있는 혜택까지 있다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2명까지 숙박이 가능하기에, 누구와 함께 가볼까? 생각만 하다가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도 않았고, 책에도 관심이 있어야하고 무엇보다 부산에서 무려 4-5시간은 걸리기에 선뜻 함께 한다는 게 쉽지가 않았다. 우연히 집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파주에 가게 되었다고 하니, 엄마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에 책을 많이 좋아하고 파주라는 출판 도시에 가보고 싶었다며, 숙박까지 제공되기에 함께 하기로 결정을 했다.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하여 합정역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한 시간 들어가는 긴 여정일거라고 미리 이야기를 했다.
토요일 당일, 회사 오전 업무를 신속하게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허물 벗듯이 옷을 갈아입으며 동시에 여행 가방을 정리하고 부산역으로 향했다. 엄마는 어제까지 소녀처럼 들떠 있었는데 막상 당일이 되니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 있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엄마에게 혼자 다녀와도 되니 쉬어도 된다고 연신 말했지만 엄마의 의지는 굳건했다, 엄마의 이번 여행 가방은 백팩이 아닌 커다란 보스턴 백에 짐을 넣었다고 했다. 당연히 가볍겠지 생각만 하고, 부산역까지 가기 바빴다.
출발하기 전 미리 주문해둔 엄마의 죽과 내 샌드위치를 구매했다. 드디어 KTX에 올라탔고, 짐칸에 엄마 가방을 올리는데 엄청난 무거움을 감지했다. 엄마의 가방에는 헤어스타일링을 책임지는 커다란 헤어 볼륨 도구와 여별의 옷들이 가득했다. 하루만 자고 오는데 어쩜 그리 많은 옷과 헤어도구가 필요한지는 항상 의문이다.
배고파서 허겁지겁 식사를 마치고, 나는 준비해둔 책을 읽었고 엄마는 잠을 자며 에너지를 보충했다.
3시간 쯤 지나서 서울역에 도착을 했고, 공항 철도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오랜만에 와도 서울의 지하철은 너무 어려웠고 복잡했다. 더군다나 무거운 백 팩을 어깨에 메고 엄마의 보스턴백을 팔에 걸고 한 손에는 스마트폰 지도를 보고 움직이려니 쉽지 않았다. 홍대입구에서 합정역으로 지하철을 갈아타야 했다. 환승 구역은 어찌나 길던지 끝이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은 너무나 많아서 벌써 기가 빨리기 시작했다.
합정역에 도착을 하고 파주로 향하는 2200번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커다란 짐들로 가득한 우리들을 보고 버스 정류장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내주어서 앉을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 드디어 파주를 향해 출발을 했다. 오랜만에 보는 이름 모를 여러 다리들과 노을로 붉게 물든 하늘과 높은 빌딩들을 보고 있자니 내가 서울에 온 게 뒤늦게 실감이 났다.
3시쯤 부산에서 출발 했는데, 파주에 도착하니 벌써 7시 가까이 되었다. 저녁인데도 날은 더웠고, 숙소를 향해 지도를 보며 걸어갔다. 커다란 숲속을 연상케 하는 덩굴나무들이 가득한 예쁜 건물부터, 작은 호수들에는 수생식물들이 가득 있었고 느티나무와 커다란 아카시아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천천히 구경하고 싶었지만, 배가 고프고 짐은 무거워서 얼른 숙소로 들어가고 싶었다. 다행히 숙소는 가까워서 찾기가 쉬웠다.
방은 깔끔한 트윈 침대와 티비 대신 책꽂이에 책이 가득 놓여 있었다. 커다란 통창 너머에는 초록 나무들과 예쁜 벽돌 건물들이 보였다. 짐을 내려놓고 우리는 누가 짠 것처럼 동시에 침대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4시간 넘게 쉬지 않고 긴장하며 걷고 무거운 짐을 들어서 몸이 많이 지쳐있었다. 5분 정도 누워 있었나, 얼른 엄마를 깨워 맛있는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건물 밖으로 나와 저장해둔 식당 들이 있는 곳으로 갔는데 분위기가 거의 마치는 분위기였다. 식당 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물어봤지만 모두 마감이었다. 그 시간은 7시 20분... 저녁 식사를 하러갈 식당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숙소 바로 앞 편의점에 향했다. 편의점 도시락과 컵라면, 김밥, 간식들을 사서 숙소에 들어갔다. 평소에는 잘 사먹지 않던 음식들인데 배고플 때 먹으니 어찌나 맛있던지, 편의점이 있음에 감사함을 느꼈다. 지지향에서 책을 빌려서 여유롭게 독서를 하며 하루를 보낼 생각이었는데, 이미 우리는 지쳐서 책은 고사하고 바로 쉬기로 했다.
일찍 잠에 들었고, 이른 새벽쯤 밖에서 새소리가 들려와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작은 새들이 짹짹거리는 소리가 너무 기분 좋게 들려왔고,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따뜻한 햇살과 살결에 닿는 선선한 바람이 더해져서 청량한 느낌이 드는 초록 여름의 아침이었다.
숙소에 마련된 조식을 먹으러 8시 30분쯤 내려갔다. 따끈한 밥과 시락국, 정갈한 나물, 스크램블과 식빵 등 간단한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름 빨리 내려왔다고 생각을 했는데, 떨어진 반찬이 많아서 혹시나 요청을 드리니 흔쾌히 다시 만들어주셨다. 대접만한 접시에 가득 만들어주신 스크램블과 식빵, 딸기쨈을 곁들여 든든하게 아침을 먹었다.
9시 30분 민음사 출판사 건물에 번호표를 받으러 갔다. 아침 일찍 부터 부지런한 사람들이 많아서 놀랐다. 대기 줄이 어마어마하게 길었고, 상기된 표정의 사람들이 설레어 하면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었다. 잠시라도 서있기 힘든 땡볕 아래에서 기다리기 지칠 때쯤, 입장을 할 수 있었고 시원한 얼음물을 마련해주셔서 더위를 조금이나마 식히면서 들어갈 수 있었다.
미리 기부해둔 책의 금액은 13만원 남짓이었다. 오늘 과연 패밀리데이에서 책을 얼마나 살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구입하고 남은 금액은 기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입장을 하자마자 사고 싶은 책들이 출판사 마다 정리 되어 있어서 눈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세계문학전집부터 SF 소설, 젊은 문학 작가 책, 여행, 인문학, 소설 책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많았고 신간들도 많았다. 그동안 사고 싶었는데 망설이고 있던 책들을 정신없이 박스에 담고 보니 금새 한가득 쌓이게 되었다. 적당히 책을 사려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졌고, 내 책 22권, 엄마 책 8권을 구입했다.
주말에도 일을 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출판사 직원분들이 너무 친절하시고 도움을 많이 주셔서 편하게 책을 찾을 수 있었다. 빠르게 정산해주시는 직원분들 덕분에 신속하게 구입까지 마무리 할 수 있었고, 책들을 택배로 정리해서 집으로 보내고 마무리를 했다. 23만원을 순식간에 결제를 해버렸고, 지갑은 텅 비어졌지만, 마음의 양식은 가득 채워진 느낌이 들었다.
이제야 한 숨 돌리며, 파주까지 온 목적을 달성하고 여유롭게 파주를 즐기기로 했다. 근처 북 카페에서 커피와 디저트를 천천히 즐기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북 카페에는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의 손님들이 많았고 모두 책을 같이 읽거나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지하철을 타도 카페를 가도 항상 핸드폰에 집중하는 사람들만 보다가, 책을 보는 사람들을 보니 쫓기며 살던 현실에서 한걸음 물러나 여유로운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늦게 도착하여 구경하지 못했던 지지향 숙소의 도서관을 구경했다. 거의 2~3층 되는 높이의 건물에 천장 끝까지 책장에 책들이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보던 책들부터, 여러 학교나 사람들이 기부한 책들까지 여러 종류의 책들을 볼 수 있었다. 누구나 책을 편하게 와서 책을 읽고 즐길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이 있다는 점이, 너무나 부러웠다. 시간만 허락된다면 다양한 책들을 읽으며 마음껏 활자 속에서 여유를 즐기고 싶었다. 정신없이 책들을 구경하다가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어제 저녁의 이른 저녁 마감 문제로 이번에는 빨리 움직이기로 했다. 하지만 가려던 인도 음식점은 만석이었고 30분 전에 이른 마감을 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파주에서 식당 밥 먹기가 이렇게 힘든 일이던가.... 빠르게 검색한 끝에 15분 정도 걸어갈 정도의 거리에 브런치 카페가 브레이크 타임 없이 운영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뜨거운 태양과 눈싸움을 하고 땀을 닦아가며 우리의 소중한 점심을 위해 빠르게 걸어갔다. 식당에서 연어 덮밥과 크림 파스타를 주문했고, 조금 비싼 가격이었지만 밥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함을 느꼈다. 브런치 카페는 2층 까지 있었고, 커다란 공간에 손님이 우리와 한 팀 뿐이었다. 조용히 재즈 음악을 들으며, 통창에 보이는 초록 나무들을 보면서 맛있게 식사를 즐길 수 있는 여유로움에 행복함을 느꼈다.
식사를 든든히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1시간 남짓 정도 남았다. 우리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파주의 여러 곳들을 천천히 산책하기로 했다. 햇빛이 너무 강해 온몸이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커다란 나무의 잎들이 가득 있는 숲 가까이에 오니 더위가 살짝 누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빠르게 다니는 차들이 가득한 아스팔트 도로를 지나니 산책길이 중간에 보였다. 작은 호수로 내려가 수생식물부터 아카시아 나무 향기를 가까이에서 맡아보고 싱그러운 나뭇잎을 직접 만지며 여유롭게 산책을 하니 지쳐있던 내 마음도 반질거려 윤기가 나는 느낌이 들었다.
아쉽게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고, 2200번 버스를 타고 다시 합정역으로 향했다. 목적지까지 오느라 진을 다 뺐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뭔가 싱그러움과 뿌듯함이 가득한 느낌이 들었다. 서울역에서 KTX가 30분이나 지연되어서 더위와 함께 무거운 짐들로 몸은 너무 피곤하고 고생했지만, 정신은 가벼워지고 소중한 경험들이 쌓이니 다시 에너지가 충만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도 망설이게 되는 일은 하고, 할 수 있는 일들은 최대한 하면서 후회 없이 여러 경험을 해보기로 마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