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3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했기에, 정확히 말하자면 부모님의 기대와 더불어 투자까지 열심히 했기에 중도에 포기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의 기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날고 기는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림을 잘 그리는 것만 같은 특출함에, 혼자 자책하며 자격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남들은 수능 치고 놀기 바쁠 때, 나는 미술학원에 틀어 박혀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12시간동안 그림만 그리며 입시 미술을 힘겹게 치러내야 했다.
매주 그림 평가, 월말 평가, 모의고사 평가까지 평가와 압박으로, 반으로 접혀 있던 그림에 대한 마음은 점점 더 작아져 티끌만큼 작아지고 있었다.
모든 기력을 다 쏟아내서, 그림에 대한 마음이 점처럼 크기가 보이지 않을 때쯤,패션디자인과에 들어가게 되었다. 패션디자인과에 입학만 하면 나의 모든 환경과 바라던 것들이 마법처럼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주입식 교육을 받으며 선택지가 한정되어 있던 초중고 생활을 지내왔던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 되어 있던 나는, 너무나도 자유롭고 스스로 선택해야 할 것이 많은 대학교 생활에 한동안 적응을 하지 못하였다. 출석 일수만 채우면 수업도 적당히 빠지고 요령껏 놀러 다니는 친구들, 과제만 잘하면 점수 잘 받는다며 호언장담하며 출석하지 않는 한량들, 밤새 술 마시다가 수업 못 나와도 지금 즐겨야 한다며 나를 답답해하는 친구들까지 유혹의 순간들이 넘쳐났고, 여러 험난한 파도들 속에서 헤엄치며 스스로 숨쉬기 위해 방황했다.
생각했던 자유롭고 화려할 것 같은 대학교 생활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디자인 전공의 비싼 등록비와 과제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알바를 쉬지 않고 해야만 했다. 밤을 지새우고도 해내지 못하는 넘쳐나는 과제들은 버거웠다.
그 당시 가장 시급이 높았던 패밀리레스토랑 아웃백에 지원을 하게 되었고, 학기 중에는 주말 알바를, 방학에는 풀타임 알바를 하며 쉬지 않고 돈을 모았다.
그리고 알바를 끝나고 나면 다시 집에 들어가 작업에 몰두해야만 했다. 어떻게든 주어진 환경에서 잘해내기 위해서 밤을 지새우며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보니 매번 학기말에는 원하던 점수들을 받으며 장학금을 놓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3학년이 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심화과정을 배우게 되었고 내가 원하던 패션디자인의 경로를 점점 이탈하는 기분이 들었다. 최선을 다해도 할 수 있는 부분이 한정적이었고, 이해조차 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못나 보였다. 그리고 모범생 스타일인 나와는 확연히 다른 한량 스타일의 친구들과는 성향과 가치관을 맞추는 것에 한계를 느끼게 되면서 혼자만 우두커니 과부하에 걸린 느낌이 들었다.
그들 사이에서 어색하게 웃으며 껍데기만 친구가 되기보다는 자칭 아웃사이더가 되기로 결정하였다.
어디에도 마음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없는, 총체적 난국의 암흑 시기를 보냈다.
처음으로 과감하게 1년 휴학을 하며 멈추는 시간을 가지고, 원하는 나를 찾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1년 이라는 시간이 충분할 거라고 생각을 했지만, 꿈꾸던 배낭여행도, 진로 탐색을 하기 위한 구체적인 생각과 용기도 없었던 나는 알바만 열심히 하며 착실한 생활들을 되풀이 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4학년이 되어 다시 복학을 하러 간 강의실에는 아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 극 내향형 인간이었지만 혼밥과 혼자만의 시간을 고독하게 즐기고, 나름 시간을 활용할 줄 아는 능력으로 승화시키며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생활을 보냈다.
오지 않았으면 했던 졸업 작품 출품 시기가 다가왔다. 정해진 주제도 주어진 예산도 없었다. 교수님과의 상담에서는 내가 돈을 쓴 만큼 졸업 작품 퀄리티가 올라간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즉 돈 없는 가난한 대학생들은 그저 비싼 소재부터 시작하여 명품 주얼리까지 치장하는 부자 대학생들의 그림자가 될 뿐이었다.
이미 전공을 바꾸거나 복수전공의 기회를 놓친 나는 어쩔 수 없이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서, 졸업 작품 비용을 최소의 금액으로 최대 효용을 낼 수 있는 만큼 벌어야 했다. 시급을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 알바 일수를 더 늘리고, 잠을 줄여가며 밤을 새면서 과제를 해내야 했다.
최소한의 예산만 들여야 했던 내 작품들은 상상하던 졸업 작품 퀄리티의 반도 따라가지 못했다. 알바로 예산을 채워야 했기에 다른 학생들에 비하면 작업실에 있는 시간도, 졸업 작품에 들인 시간과 정성도 턱없이 부족해서,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졸업생들의 작품들 중에서도 어울리지 않는 작품으로 몰표를 받는 치욕적인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물러설 곳이 없었던 나는 어떻게든 해내야 했기에 적당히 타협해가며 최종에 최종 최최최종 진짜최최최최종을 거쳐서 완성을 했다.
아직 뛰어난 재능은 찾지 못했지만, 끈기 하나는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당시에는 나는 왜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나지 못했고, 마음 맞는 친구들은 왜 없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컸다. 돈 걱정 없이 작품에만 몰입하며, 내가 원하는 작품을 마음껏 만들면서 친구들과 오롯이 즐기며 대학생활을 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잘 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몸으로 직접 부딪치며 돈에 대한 소중함을 절실히 알게 되어서 남들보다 빠르고 확실하게 생활력이 길러졌다. 초중고 대학교 친구들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닌, 정해진 범주 안에서 친구들을 맞춰 사귀어야 하는 시스템이다. 아직 마음 맞는 친구를 찾지 못했고, 언제 찾을지는 모르지만 그 속에서 혼자 자생하는 방법을 깨달으며 누구보다 독립적으로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스스로를 자책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차라리 편한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스스로를 더 아껴줄 명분이 생겼고, 선명한 목표를 위해 겪을 앞으로의 여정이 기대 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