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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은 너무 어려워

당신은 시작이 어려운가요? 끝이 어려운가요?

by 프롬나

오늘도 나는 핸드폰 화면의 스크롤을 쭉쭉 내리면서 블로그 후기, 유투브 비교 영상. 사용 후기까지 놓치지 않고 무언가 계속 찾아보고 있다.

찾아보고 있는 것의 정체는 바로 아이패드.

그림 그리고 싶은 용도로 사고 싶어서 벌써 1년째 디깅만 계속 하고 있다.

내 목적에 맞는 아이패드 사양은 어떤 건지 찾아보며 눈을 높이다가 가격을 보고 주춤하며 정말 나에게 필요한 제품인지 스스로에게 재차 물어보기를 반복하고 있다.


[ 아이패드를 사야 하는 이유에 대한 질문 ]

1.내가 이 물건이 없으면 생활이 불가능한가?

2.내가 할부로 갚을 여유가 되는 것인가?

3.내가 아이패드를 얼마나 잘 활용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큰 화면으로 영상만 보고 있다는 경험담을 보면서 걱정이 되었다.)


여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얼마나 잘 활용할 것인가에서 탈락되었다.

하지만 내 알고리즘은 이미 아이패드로 점령되어서 하루의 시작과 끝을 관련 영상과 후기를 찾아보는 걸로 마무리 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점점 지쳐서 디깅 횟수는 줄어들었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는 아이패드로 멋지게 그림을 그리는 내 모습을 상상하고는 했다.


하지만 뚜렷한 목표와 활용성이 없었고, 재미와 단순 욕심으로 구매하기에는 너무나 고가의 금액이었다.

가성비 목적으로 갤럭시 보급형으로 펜이 포함된 탭을 구매한 적이 있었지만 처음 몇 번만 끄적이고는 서랍에 고스란히 보관되었던 적이 있어서 더 망설여졌다.


그렇게 1년을 아이패드에 눈독만 들이다 시간은 지나갔고 우연히 원데이 클래스 수업으로 아이패드 드로잉 수업을 듣게 되었다. 2시간 남짓 되는 시간에 프로크리에이트 프로그램 사용법과 애플펜슬로 그림 그리는 방법을 배웠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원하는 브러쉬, 질감, 색감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순식간에 수정도 가능했다.

수채화, 색연필, 콩테, 파스텔, 유화, 연필, 사인펜, 페인트 등 여러 브러쉬로 무한대로 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점이 너무나 신세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 정규반 수업 인원도 모집 중이라서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수업은 3일 뒤 시작이었고, 아이패드 대여도 가능했다.

나는 적극적으로 물어보고 그 자리에서 꽤 큰 금액의 수업 금액이었지만 정규반 수업 등록을 해버렸다.

그때부터 내 심장이 터질듯이 뛰기 시작했다. 2년 동안 뭔가 시작도 하지 못 하고 망설이던 나에게, 온 세상이 할 수 있다고 힘차게 응원해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정규 수업 2회를 듣자마자 추천을 받아서 아이패드를 하루 만에 구입해버렸다.

가장 고사양급으로 무리해서 구입했는데 전혀 후회도 없었고 너무 후련하기 까지 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었구나, 하고 싶은 건 하고 살아야지'


2년 동안 시작도 못한 일을 불과 일주일 만에 후다닥 초고속으로 진행을 했다. 그러면서 나는 또 한 번 느꼈다. 나는 시작이 정말 어려운 사람이지만 일단 시작이라는 버튼이 눌러지면 옆에서 누가 말려도 추진하는 힘이 있었다.


지금까지 가장 잘 산 아이템이 있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아이패드라고 말하고 있다.

아이패드로 좋아하는 그림을 실컷 그리기만 해도 뽕을 뽑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여러 기능까지 조금씩 섭렵해가면서 자주 사용하고 있다.




단편적으로 물건 사는 일도 시작을 못했지만, 나는 인간관계의 시작도 어려워했다.

매학기 때마다 반 배정을 받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설레이는 관계의 시작이 아니라, 어색하고 부끄러운 분위기를 견뎌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너무 컸다.

유약했던 나 자신을 돌보기에 자신감은 결여되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마이너스일 정도로 자기연민이 가득했다.


그렇게 초중고등학교의 과정 12년을 힘들게 버텨오다 대학교의 분위기는 뭔가 달랐다. 정식으로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어색함을 떨쳐낼 수 있는 마법의 알콜이 있었다.

신입생 환영회의 날이었다. 쭈뼛대던 분위기도 마법의 음료를 들이키다 보면 동기, 선후배들모두가 서로 부둥켜안고 있고 절친이 되어 있었다.


순수했던 나도 사람들과 친밀해지는 이 순간을 즐기면서, 이 관계들이 영원할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폴딩 도어처럼 있는 데로 마음을 활짝 열고 나를 다 보여주었다. 그저 사람 좋아하는 리트리버였던 나는 그날을 아주 신나게 기억하며 행복하게 잠이 들었다.

하지만 그 다음날에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 것처럼 다들 못 본 척 하거나, 인사를 해도 너무 어색해했다.

강렬했던 어제가 혹시 몰래카메라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달라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큰하게 술에 취해 두꺼웠던 낯가림이 자연스럽게 벗겨졌고, 한여름 밤의 꿈처럼 그날만큼은 신나게 모두 흥에 취해있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경험들이 점점 쌓여 가고 앞뒤가 심각할 정도로 똑같았던 나는, 특히 인간관계를 시작할 때가 항상 힘들었다.

처음부터 쉽게 일을 해내고, 친밀하게 관계를 이어나가는 사람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들을 동경하며 따라 해보려고도 해봤지만 사람의 천성은 잘 바뀌지 않았다.


"급하게 먹으면 체 한다" 는 어르신들의 말씀처럼 나는 항상 내 속도를 유지 하지 못하고 이끌려가다 보면 뭔가 꼭 탈이 났다.


다년간의 쌓아온 나만의 빅 데이터로 이제 급하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면 애써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시작이 두려워서 관계 형성이 힘들었지만, 그 중에 살아남은 열에 한 둘이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고 있는 관계들이다. 좁고 아주 깊은 인간관계의 주축인 친구들은 모두 나처럼 시작을 두려워하지만 ‘내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면, 모든 걸 내어주는 속 깊은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목표에 따르는 일이든 인간관계든 나는 시작을 아주 어려워한다.

방아쇠를 당기기 전까지 수많은 걱정과 망설임 그에 따른 희생과 노력이 더해지지만, 막상 방아쇠가 당겨지면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서 응원 하고 나를 돌보다보면 어느새 자연스럽게 마무리가 잘 되어있는 게 느껴졌다.


혹여나 내가 한 선택의 끝이 후회로 점철 되더라도 어렵게 시작하고 해내는 과정을 오래도록 기억하며,

시작을 어려워할 수는 있어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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