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태고량주와 마라샹궈, 맥주와 떡볶이
생각해보면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일명 먹보였다.
태어났을 때부터 내가 먹는 걸 너무 좋아하고 잘 먹어서, 잠깐이라도 입에서 분유통이 떨어지면 집이 떠나갈 정도로 울어서 힘들었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다.
내가 우렁차게 울면서 보채는 시간 안에 분유를 만드는 게 힘에 부쳤던 엄마는 특단의 조치를 마련하셨다.
분유를 내가 다 먹어갈 때 즈음에 새 분유를 가지고 미리 대기를 하고 있다가, 입에서 떼어내자마자 2인 1조로 누군가가 새로운 분유통을 내 입에 넣어서 울 수 있는 틈도 주지 못하게 방어했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가족들은 대부분 보통 체형인데 나만 유독 키와 덩치가 큰 것은 잘 먹어서 잘 컸고, 입 옆에 작은 점이 있는 것도 먹을 복이 많다는 걸 반증 해준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면 학교 마치고 문을 열고 도착하면 엄마가 따끈하게 금방 만들어놓은 음식을 시간 맞춰서 잘 왔다며 좋아했고, 집에 먹을 간식이 다 떨어질 때쯤 누군가가 선물을 사왔다. 항상 내 앞에 음식이 끊이지 않는 걸 보면서 어른들은 내가 먹을 복이 타고 났다며 놀라워했다.
일요일 아침마다 우리 가족들은 집 가까운 기사식당에 가서 순두부를 먹는 게 오랜 루틴이었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뜨거운 것을 정말 잘 먹는 어린이가 되었고, 그래서 지금까지 이렇게 입 천장이 단련이 되어왔다는 것을 그때는 잘 몰랐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을 호호 불며 한 숟갈 떠먹으려고 하면, 100도가 넘는 순두부 찌개와 밥 한 공기를 아버지는 5분도 안 돼서 다 비웠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래서 그 속도를 어린 마음에 조금이라도 따라잡으려고 허겁지겁 먹다보면 입 천장이 데이는 게 허다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누구보다 뜨거운 커피와 국밥을 정말 빨리 잘 먹는다. 이런 것도 특기가 되려나...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저체중에 음식을 주면은 잘 먹었지만, 찾아서 먹지는 않는 수동적인 아이였다. 그런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와 중학교 2학년 때 키가 10cm씩 비약적으로 자라면서, 나는 드디어 음식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눈만 뜨면 배가 너무 고팠고, 밥을 3끼 먹는 것에 성이 차지 않아서 항상 배고픈 상태였다. 너무 잘 먹어서 엄마가 숨겨둔 간식 창고를 귀신 같이 알아내서 작은 빅 파이 과자를 자로 4등분해서 아껴 먹었던 기억, 친구들과 물떡 오뎅 포장마차를 발견해서 매일을 하교 할 때마다 물떡이나 오뎅 한 개와 국물을 무한정으로 먹었던 기억이 있다.
성인이 되면서 술을 접하고 나서부터 나의 세계는 아주 다양하게 확장되었다. 두툼한 방어회를 와사비 가득한 간장에 살짝 찍어서 입에 넣고, 미지근한 소주 한 잔을 함께 페어링해서 먹던 첫 맛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거기에 매운탕까지 마무리를 하니 이런 게 술의 맛인가 싶을 정도로 아버지들이 소주와 국물을 찾는 이유를 알 것만 같은 날이었다. 그리고 나는 점점 어느 술과 나와 궁합이 잘 맞는지 찾기 시작했다. 애석하게도 달큰한 국물과의 궁합을 알게 해준 소주는 블랙아웃을 경험한 뒤로 나와 잘 맞지 않아서 즐기지는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소주를 처음 잔에 따를 때의 또르르 소리와 첫 잔과 회 한 점, 국물 한 숟가락을 함께 했을 때의 황홀함은 가끔 즐기고 싶다.
어느날 동네 근처에 한 평 남짓한 마라탕 전문집을 발견하게 되었다. 빨간색 간판에 사장님 얼굴이 크게 그려져 있어서 처음보자마자 강렬하게 시선이 이끌렸다. 가게 안에는 바 형식의 4명 정도 앉을 수 있는 기다란 테이블이 있었고, 의자 아래에는 해바라기씨 껍질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음식이 나오기 전에 해바라기씨를 내어주시는데 그 껍질을 바닥에 편하게 버리라고 하셨다. 생각해보면 수북하게 쌓여있던 껍질들이 이 가게의 시그니처가 되었던 것 같다. 사장님이 혼자 운영하는 작은 가게였지만, 날이 갈수록 가게는 조금씩 커지게 되었고, 지금은 부산 서면에 크게 한 개, 서울에는 크게 체인점이 생기게 되었다. 예사롭지 않은 수려한 말솜씨와 야무진 손을 가진 사장님의 꿈은 아주 원대했던 것 같다.
마라 향신료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고수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분명히 나는 태국 현지에서 똠양꿍을 먹고 화장품을 먹는 것 같아서 고수를 입에도 되지 않았는데, 어느새 나는 마라탕에 고수는 물론 고기와 함께 소 여물처럼 씹어 먹을 정도로 고수 러버가 되었다. 향신료 향을 어떻게 극복하게 되었을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나는 국물을 좋아해서 접근 방식이 조금 더 거부감이 없었던 것 같다. 분명 코를 딱 찌르는 거센 풀 향이 나는데, 국물에 고기와 함께 어우러지니 그 향이 깊고 풍부한 조화를 이룬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고수와 고추기름이 팍팍 들어간 얼큰한 마라탕에 담긴 양고기의 조화는 정말 신선한 경험이었다. 빨간 육개장 같은 국물인데 먹어보면 이국적인 신선한 향과 깊은 야채 육수의 조화가 꽤나 식욕을 자극했고, 양고기는 소고기와 다르게 특유의 쫄깃함과 고소한 향이 더해지니 마라탕의 풍미를 좀 더 끌어올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음식을 처음 먹어보는 것도 신기한데, 그 가게의 사장님이 입담이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그 가게의 모든 음식들을 하나씩 격파하기 시작했다.
입에도 대지 않던 어항 가지 튀김을 찾게 되었고, 마라롱샤도 즐기게 되었다. 어느날 마라 샹궈라는 음식을 팝업 형식으로 3일간만 판매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이 아니면 못 먹는다는 압박감과 새로운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서, 어느새 가게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마라탕과 다르게 마라샹궈는 볶아져서 나오는 음식이었고, 항상 국물을 찾던 내가 희한하게 마라샹궈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중국 당면 특유의 넓적 당면과 땅콩가루가 살짝 뿌려져 있는 비주얼이 신기했고, 빨간 고추기름에 버무려져 있는 양고기와 청경채, 아삭한 숙주나물, 건두부와 오뎅, 비엔나 소세지와 연근까지 재료들의 궁합이 놀라웠다. 살짝 맵다고 생각이 들면 야채와 고기를 땅콩소스에 듬뿍 찍어먹으면 고소해져서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화룡점정은 마라샹궈와 함께 먹은 연태고량주였다. 도수가 높기 때문에 살짝 걱정을 하면서 한 모금을 입에 머금고 있다가, 마치 쓴 물약을 삼키듯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겨우 넘겼다. 도수 높은 고량주가 입 안을 거쳐 식도로 그리고 내 장기까지 내려가는 게 마치 3D로 그려지듯이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고추기름을 머금고 있는 야채와 부속 재료들이 입안을 살짝 코팅을 하고 있을 때, 중국 당면의 쫄깃함으로 입천장을 찰지게 때려주면서 면치기를 해주고, 양고기의 쫄깃한 식감으로 마무리 할 때쯤 고량주 한 모금을 더해주면 입 안에서는 이미 중국 어느 노포집에서 퇴근길에 집안의 가장이 되어 하루의 고단함을 풀어주며 한잔 하는 것 마냥 동기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왜 기름기 있는 중국음식에는 도수 높은 술이 많은지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매콤하고 기름기 있던 입 안도 연태고량주 한 모금이면 다시 새롭게 뭐든 시작할 수 있게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고, 마지막에 느껴지는 파인애플 향까지 기분 좋게 마무리를 해주는 합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음날 숙취가 전혀 없는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술과 음식의 페어링을 물어본다면 나는 상당히 고민이 된다.
어쩌다보니 하루의 끝을 반주를 하며 혼술을 하는 게 나의 즐거움이 되었다.
유난히 고되게 일을 했던 하루의 끝이나, 뭔가 잘 안 풀리는 하루를 보내고 나면 그렇게 매콤한 떡볶이가 먹고 싶다. 쌀떡 밀떡을 크게 가리지는 않지만, 굳이 고른다면 찰진 쌀 떡볶이에 라면 사리까지 넣은 라볶이를 정말 좋아한다. 국물이 자작하게 깔리고, 양파나 파를 조금 넣어주고 삶은 달갈까지 더해주면 국물은 달큰해지고 좀 더 깊은 맛의 라볶이를 먹을 수 있다.
그리고 매콤한 라볶이에는 국룰인 톡 쏘는 청량한 맥주를 한잔 마셔준다. 사실 맥주를 마시고 싶어서 먹는 게 라볶이인 게 나의 본심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나와 맞는 술은 무엇인가 많은 실험과 분석을 해보았지만, 블랙 아웃을 겪은 소주, 다음날 숙취가 심한 막걸리, 아직 어렵게 느껴지는 와인과 위스키로 분석이 나왔다. 맥주는 어떻게 먹어도 다음날 숙취가 전혀 없었고, 취해 본적도 아직까지 없다. 주로 목 넘김이 좋은 라거 종류를 선호하는 편이고, 라볶이와 좋은 궁합의 맥주는 코끼리가 마스코트인 초록색 필 라이트이다. 특유의 탄산이 센 편이라서 매운 떡볶이와 먹으면 중화가 되는 느낌이 들고, 가성비 있는 가격과 도수도 낮아서 쉽게 접할 수 있어서 좋아한다. 묵직한 기네스 흑맥주와 올리브오일과 소금이 살짝 뿌려진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조합도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오늘 살짝 기분을 내고 싶거나, 마침 내일이 휴일이라면 전투적으로 준비를 해준다.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두거나 미리 배달 시켜준다. 그리고 집 앞에서 칭따오 맥주를 사서 들어가서 미리 얼려둔 500cc 잔에 맥주 9: 연태고량주 1 비율로 섞어서, 커다란 얼음을 넣고 천천히 마셔준다. 칭따오 맥주가 없다면 진토닉을 9로 섞어서 마셔줘도 꽤 괜찮다. 칭따오 맥주만의 혀끝이 아리는 신맛 나는 탄산과 연태고량주의 파인애플 향이 더해져서 같이 마시면 느끼한 음식을 얼마든지 더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잘 어울린다.
우연히 주워들어서 연태고량주와 칭따오 맥주를 섞어서 마셔주기 시작했는데, 이 조합이 꽤 괜찮아서 아직은 다른 술이 내 1순위가 되지는 못할 것 같다.
소소한 일상생활 속에서 나만의 낙을 찾아가는 게 술 한잔이라면, 그 술과 궁합을 이루는 음식 페어링도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나는 어떤 순간에 어떻게 먹느냐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테면 열심히 운동 하며 땀 흘리고 사람들과 함께 먹는 삼겹살과 맥주 한잔, 그리고 특별한 기념일에 한 번씩 먹는 와인과 스테이크 혹은 치즈가 정말 환상의 궁합이라고 생각한다.
배드민턴이라는 운동에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하면서부터,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니기에 사람들과 관계도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운동을 하고 나서 가끔 사람들과 밥 한 끼 먹으면서 반주로 맥주 한잔 하면서 못했던 이야기도 나누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한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느새 내가 가지고 있던 고민들은 눈 녹듯 녹아 없어지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게 사람의 온기라고 생각한다. 그 온기도 술 한잔 혹은 밥 한끼 먹으면서 좀 더 빠르게 전해질 수 있다는 걸 몸소 경험하게 되었다.
어른들을 만나면 첫마디가 항상 “밥은 먹었니?” 라는 말을 인사말로 많이 하는 게 한국의 문화이고, 그게 한국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밥에 대한 ‘정’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으로 상처 받은 마음을 사람으로 다시 극복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기에 개인주의적으로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기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화합하며 정을 함께 나누고 사람과의 온기를 느끼면 좀 더 따뜻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식사를 할 때 자주 반주를 하시는 걸 보면서, 어른들의 세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어느새 내가 그 유전을 그대로 이어 받아서 반주를 좋아하는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
이번 설날에도 선물 받은 위스키와 함께 하이볼을 만들어드리고, 그걸 신기해하며 좋아하는 가족들을 보며 내심 뿌듯했다. 어디에서 배우지도 않았는데 나만의 본능으로 술을 조합하여 만들고, 그 술에 맞는 음식들을 페어링 할 생각이 먼저 떠오르는 걸 보면 어쩔 수 없는 먹보인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음식을 좋아하고 잘 먹는 다는 것이 뭔가 부끄럽고, 숨기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정말 음식을 좋아하고 그것을 잘 즐기고 있는 걸 보면서 온전히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어떻게 하면 음식과 술, 혹은 새로운 음식들을 좀 더 색다르고 깊게 즐길 수 있는지 계속 연구하는 게 너무 즐겁다.
의식주가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다들 알 것이다. 나는 그 중에 ‘식’이 인생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나에게는 빛과 소금 같은 음식이라는 분야를, 낱낱이 파약하여 여러 음식들을 맛보고 즐기며 더 깊게 음미하며 살고 싶다.
오늘 반주의 궁합은 무엇으로 결정을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