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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 Oct 25. 2022

열두 살이 되어 가는 d에게


슬픔은 무게를 품고 있어요. 슬픔에 잡힌 몸은 가벼워질 수 없죠. 슬픔에 빠진 몸은 사뿐히 걷지 못해요. 그럴 때는 슬픔보다 더 무거운 몸이 되어 보는 거예요. 기쁨을 향해 발버둥 치지 말고 침잠. 고요히 바라볼 것. 깊은 밤은 제법 쓸모가 있는데, 몸이 슬픔보다 더 무거운 시간이거든요. 나도 세계도 잠이 되어 아득해지려 할 때 몸은 가라앉고 슬픔은 떠올라요. 슬픔을 분리하고 슬픔을 살피고 슬픔을 이야기하다 보면 슬픔이 서서히 증발할 수도 있죠. d는 어떻게 알았을까요. 무거운 몸을 누이고 깜깜한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엄마,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는 늘 약간의 슬픔이 묻어있어요.      


-엄마, 나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 진짜 친구 말이야. 딱 우리 할머니 같은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 타임머신을 타고 할머니가 열한 살이었을 때로 가서, 할머니를 태워 지금 여기로 데리고 오고 싶다. 우리 둘이 서로한테 믿음직한 친구가 되는 거야.

-왜 그런 생각을 했어? 혹시 외로운 마음이야?

-응 조금. 나 친구는 많은데, 그런데 외로울 때가 있어.


열두 살이 되어가는 d에게 ‘친구’는 때때로 슬픈 단어예요. 수업이 끝나고 운동장을 향해 달리고, 발끝이 하늘까지 닿도록 그네를 타고, 실내화 가방을 휘휘 돌리며 나란히 걷고, 떡꼬치를 손에 들고 커다랗게 웃지만 너와 나의 우정은 온통 기쁨일 수 없어요. 우정의 신전에 제물을 바쳐야 할 때가 올 테죠. 겪어봐서 알아요.

      

저에게 친구는 애써야 얻을 수 있는 것이었어요. 온 힘을 다해서 괜찮아야 하는 것. 충고와 조언을 가장한 비난을 받을 때도 괜찮아 나를 위한 거잖아. 나만 모르는 약속을 하고 그날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내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할 때도 괜찮아 예민하게 굴 필요 없어.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내 흉을 봤다는 말을 전해 들어도 괜찮아 내가 잘못한 부분도 있었지. 하고 나를 달랬어요. 그렇지만 괜찮아는 나를 위로하는 단어가 아니라 친구를 이해하는 단어. ‘성격 좋은 애’가 되는 대신 내가 가지고 있던 색깔이 조금씩 흐려졌던 것 같아요. 알고 있었지만 괜찮아, 괜찮아. 저는 친구가 갖고 싶었으니까요.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친구가 있어야만 했으니까요. 왜냐하면, 그게 ‘정상’이거든요.      


d는 색깔이 분명한 사람. 예술과 자연을 사랑해요. 위대한 작가의 소설에 감탄하는 마음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고, 나무 그늘 아래 나란히 앉아 눈앞 풍경을 그리고 싶고, 입장권을 끊고 들어가 동물을 구경하는 동물원에 반대하고, 반려동물을 ‘샀다’는 말에 화를 내요. 이렇게 쓰고 보니까 아주 근사한 어린이 같네요. 하지만 d의 말대로, 진짜 친구가 없는걸요. d는 자기 생각을 잘 전달하는 방식을 배우고 있는 중이라서, 성마르게 표현할 때가 있어요. 게다가 그 생각이라는 게 예술과 자연이라니, 친구들이 잘난 척한다고 흉을 본대요. 대화를 할 때 지루하다고 일부러 하품을 하거나 잠든 시늉도 하고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d는 제법 눈치가 빨라서,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예술과 자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때와 장소를 가리게 되었어요. 언젠가 d의 메모장을 본 적이 있는데, ‘학교 생활을 잘하는 법’이라는 제목 아래 이런 문장들이 모여 있었어요.       


이야기를 시작할 때 상대의 표정을 보고 관심이 없다면 멈출 것. 학교와 학원에서는 되도록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하지만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나고 싶다.   


혹시 d가 저를 닮아 그런 걸까요. 친구들과 잘 지내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아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요. 아마 소풍 가는 날 혼자만 짝꿍이 없을까 걱정하고 나만 모르는 단체 채팅방이 생길까 불안하겠죠. 소외되거나 배제되지 않고 친구들과 원만하게(사실은 무사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도 이해가 가지만 선명하던 d의 색깔이 이런 식으로 흐려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고 그래요.

     

우정은 원래 그런 건가요? 진정한 친구와 영원한 우정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주 소중한 것인가요? 그것을 얻으려면 대가는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건가요?      


할머니 같은 친구를 가지고 싶은 d와 세상이 말하는 친구와 우정의 의미를 의심하는 저에게, 완벽하지 못해도 확고한 대답을 해주는 그림책이 있어서 같이 나누고 싶어요. 제시카 러브가 쓰고 그린 그림책 <인어를 믿나요?>는 정말 아름다운 책이에요.



인어가 되고 싶은 남자 어린이 줄리앙이 있어요. 굳이 남자 어린이라고 성별을 밝힌 이유는 줄리앙의 성 정체성 때문이에요. 티셔츠와 바지를 훌훌 벗어던지고 길고 풍성한 머릿결과 아름다운 인어 꼬리를 휘날리며 바닷물을 가르는 꿈을 꾸거든요. 그 꿈을 현실로 만들고요. 나무와 꽃으로 머리를 장식하고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하늘거리는 레이스 커튼으로 인어 꼬리를 만들어 입고 거울 앞에서 포즈. 줄리앙이 행복해 보여 좋아요. 행복은 잠시. 할머니에게 줄리앙의 남자‘답지 않은’ 모습을 들켜 버리고 줄리앙은 주눅이 들지만요. 하지만 할머니 손에는 예쁘게 빛나는 목걸이가 있네요. 목걸이 덕분에 줄리앙은 더 아름다운 인어가 되었고요. 할머니와 줄리앙은 손을 잡고 거리를 같이 걸어요.      


이 그림책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겠지만, 저는 친구와 우정에 대한 이야기로 읽고 싶어요. 줄리앙에게는 할머니가 있죠. 줄리앙과 할머니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을 보고 있으면 좋은 친구와 우정의 조건에 ‘나이’는 없다는 생각을 해요. 고유한 너로 존재할 수 있도록 고개를 끄덕이는 태도. 그 태도가 있다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고 우정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 그 태도가 있어야 우리는 우정을 나눌 수 있어요.

 


친구를 갖지 못해 조급했던 지난 시절을 생각해요. ‘우리’가 되기 위해 애쓰던 날들. ‘존재’나 ‘인정’ 같은 단어들은 잘 몰랐지만, 이들 곁에서 존재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날들. 조금만 용기를 냈다면 좋았을 텐데. 진정한 친구와 영원한 우정을 얻기 위해 애쓰지 않는 나. 나 그대로 있어도 또 너 그대로 있어도 같이 길을 걷는 사이에서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는 진실을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외롭다는 d의 말에 덜컥 걱정부터 들었어요. 하지만 d는 이미 행복한 사람으로 살고 있었네요. 할머니 같은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친구로서 할머니가 곁에 있잖아요. d는 타임머신을 탈 필요가 없어요. 그 친구 곁에 앉아 하고 싶은 이야기, 마음 놓고 마음껏 하기를 바랄게요.       


이 그림책의 원제는 ‘Julian is a Mermaid’입니다. 한국어 번역판은 ‘인어를 믿나요?’고요. 저는 둘 다 참 좋아서 합쳐서 부르고 있어요. '줄리앙은 인어, 줄리앙을 믿나요?'


저 역시 누군가의 친구가 되고 싶어요. 있는 그대로 같이 길을 걷는 사이. 그런 사이 한쪽에 제가 있음을 사랑하는 어린이들과 어른들에게 알려야겠어요. 이 말을 덧붙이면서요. 너는, 너. 너를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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