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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Feb 23. 2023

결혼을 해보니

어쩌다 홍콩

펑씨와 나는 처음부터 결혼할 마음은 있었어도 결혼식을 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내가 20대였다면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장에 들어서는 낭만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타인의 결혼식을 50-60번가량 참석한 뒤 30대 중반이 되자 결혼식은 행사 기획의 끝판 대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100명 참석하는 회사 행사만 기획해도 할 일이 어마어마한데, 내가 주인공인 행사에 수 백명의 손님을 모셔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머리가 복잡해졌다. 행사 기획에 크게  소질이 없는 펑씨도 전세계에 흩어진 친구들을 초대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복잡해지는 눈치였다.


결혼식을 크게 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아주 많았지만 첫 번째 이유는 나의 의지박약이다. (한국에서 결혼을 하는 경우) 결혼식 준비에 쓸 에너지와 의지가 당시에 나에겐 부족했다. 결혼식을 준비하려면 한국 예식장 섭외, 스드메, 손님 초대 등등 해야 할 일이 오백만 가지인데 이 모든 것을 외국인인 펑씨를 끌고 홍콩과 한국을 오가며 준비한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또한, 내 손님보다 아빠 손님이 더 많은 내 결혼식을 상상하니 결혼식을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사라졌다. 한국에서 결혼식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 아빠는 아주 많이 섭섭해하셨지만, 내가 주인공이어야 하는 날인데 내가 얼굴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북적대는 결혼식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나에겐 웨딩드레스를 입고 싶은 로망도 전혀 없었다. 평소에도 흰색 옷을 잘 입지 않는 나에겐 웨딩드레스는 그냥 무겁고 예쁜 드레스일 뿐이었다.


우리는 바라던 대로 간단하게 결혼했다. 하지만 이 간단한 결혼을 하기 위해서도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한국에서는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하고 언제든 혼인신고를 하면 되지만 홍콩은 절차가 달랐다. 결혼식과 혼인 신고가 동시에 이뤄지는 시스템이었다. 혼인 신고 날짜를 잡기 위해서도 정부 시설에 공무원을 찾아가야 했다. 아 복잡해... 우리는 정부 시설을 찾아가서 구두로 담당 공무원 앞에서 미혼 또는 이혼으로 인해 혼인 상태가 아님을 먼저 서약한 뒤, 시청 또는 정부 비인가 외부 시설에서 언제 혼인 신고를 할지 날짜를 정했다. 우리는 당연히 시청에서 하는 방식을 정했지만, 시청 외 시설에서 결혼을 하게 되면 결혼식날 변호사를 고용해야 한다고 들었다. 펑씨의 기혼 친구 한 명이 결혼식 날 변호사가 필요하면 사람을 소개해준다고 해서 그제야 이 복잡한 시스템을 이해하게 됐다.


혼인 신고만 하는 시청 결혼식 참석자를 두고도 펑씨와 시어머니 사이에 의견 갈등이 있었다. 한국에 있는 나의 가족은 불가피한 사정이 생겨 참석할 수 없게 됐지만, 시어머니는 홍콩에서 하는 결혼식에 친척들을 다 부르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펑씨는 우리 가족도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신랑 가족으로만 결혼식이 북적대는 것이 나한테는 실례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시어머니와 싸운 끝에 펑씨의 의견을 관철시켰다. 시어머니는 섭섭해하시는 눈치였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순순히 양보하셨다. 대신, 홍콩 전통대로 결혼식 다음날 만찬 장소를 예약해서 펑씨네 친척들을 대접했다. 그래서 결혼 당일에는 신랑 신부, 홍콩 시부모님만 참석하는 아주 단출한 모습이 연출됐다.


15분짜리 초미니 결혼식이지만 결혼 날짜가 다가올수록 우리 가족이 내 결혼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펑씨와 나는 줌으로 가족들과 아주 가까운 친구들만 불러서 우리의 결혼을 생중계하기로 했다. 결혼식날 블랙 드레스 입고 백팩에 맥북을 넣어간 신부, 나야 나야! 한국과 홍콩은 물론 전 세계에 흩어진 친구들을 초대하다 보니 시차가 걱정됐으나 영국에서 새벽 6시에 접속한 펑씨의 친구 한 명은 예쁘게 화장까지 하고 결혼식 시간에 맞춰 줌에 들어와 있었다! 줌 접속이 복잡해 제일 걱정했던 우리 아빠는 양복 재킷을 걸치고 제일 먼저 접속하셨다. 급하게 준비한 줌 결혼식에 시간을 내 참석해 준 우리의 모든 친구들이 너무 고마웠다.



한국에서 사온 블랙 드레스! 평소에도 입을 수 있는 실용적인 드레스라고 생각하며 샀지만 정말 평소에 입을 일이 없다..


나는 결혼식날 한국에서 준비해 온 블랙 드레스를, 펑씨는 침사추이에서 맞춤 제작한 네이비색 정장을  입었다. 결혼식 당일 내 화장은 네이버 폭풍 검색으로 찾아낸 한국말을 잘하는 홍콩 현지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K-메이크업 스타일로 완성, 부케는 펑씨 친구의 아내가 운영하는 꽃집에서, 결혼식날 사진 촬영은 사진작가인 펑씨 친구의 친구를 소개받아 해결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펑씨의 지인들 덕분에 남의 나라에서 결혼식을 꾸역꾸역 잘 해냈다.


펑씨 친구가 결혼식날 눈물이 나지 않더냐고 물었다. 전혀. 10분 만에 진행된 우리 결혼식은 눈물이라는 감정이 들어갈 분위기가 전혀 나지 않았다. 시어머님은 노트북 카메라 각도가 맞지 않다며 결혼식 내내 노트북에 신경 쓰고 계셨고, 우리의 혼인 서약을 진행한 시청 공무원은 결혼에 대해서 나보다 더 잘 모를 것 같은 20대 초중반의 젊은이로 보였다. 실례지만 선생님 몇 살이세요..? 주말 시청 결혼식은 더 비싸다고 결혼 날짜를 잡을 때 공무원이 비용을 더 청구했는데, 아마도 그것은 주말 근무 시청 당직자 수당이었나 보다.


결혼을 하고 나서 지나간 인연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내 결혼 소식을 뒤늦게 안 옛 친구는 결혼식 다음 날 축하한다는 말 대신 "결혼 소식을 남에게 들어서 섭섭하다"는 문자를 보냈고, 10년 넘게 연락하지 않았던 한 언니는 뒤늦게 결혼소식을 건너 들었지만 축하해주고 싶어서 망설이다가 문자를 보냈다고 했다. 어떤 문자는 하루종일 나를 속상하게 했고, 어떤 문자는 내 하루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결혼을 하면 인연이 자연스럽게 정리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된 사건들이었다.


우리 가족들이 참석하지 못해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초간단 결혼식에 아주 만족한다. 이 초간단 결혼식을 준비하는 과정도 에너지가 부족한 우리 부부에겐 너무나도 힘들었으니까. 결혼식 다음날 친척들과 만찬을 하고 우리 부부는 집에 와서 바로 뻗어버렸다. 정석대로 결혼식을 올리는 모든 부부들, 결혼식 끝내고 바로 유럽으로 신혼여행 가는 부부들, 신혼여행 다녀와서 다음날 바로 출근하는 부부들..!! 나는 여러분들의 에너지와 체력이 부럽다. 체력과 에너지가 부족한 우리 부부는 신혼여행도 9월로 미루기로 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박사 2학기가 바로 시작된 30대 중반 아줌마는 이제 모든 체력을 공부에 쏟아부어야 한다..  







백팩과 맥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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