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홍콩
오늘은 주절주절 내가 사는 이야기나 적어보려고 한다. 홍콩에 온 지 벌써 9개월. 홍콩에 온 지 6개월이 지난 시점부터 홍콩이 조금씩 내 집 같이 느껴졌다. 결혼을 하고 주거의 안정성이 생겨서 그런 점도 있지만, 학교, 요가, 클라이밍, 교회 성가대, 광동어 수업 등 규칙적으로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만들자 이곳에서의 삶이 편해졌다.
최근에는 별 일이 있기도 했고, 없기도 했다. 2학기 코스 워크가 다 끝나서 5월에 가족들을 만나러 짧게 조용히 한국을 다녀왔고, 영국에서 같이 공부했던 상하이 친구 Y가 남자친구와 함께 홍콩에 와서 손님 대접하느라 분주했고, 6월 초에는 첫 학회 발표가 있어서 가슴 쫄리는 경험도 했다. 그 와중에 지도 교수님이 바뀔 수도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서 평온한 일상이 조금 흔들렸다.
이제 박사 공부를 시작한 지 딱 9개월. 학교에서 반 친구들과 교수님을 대상으로 10번도 넘게 발표했지만, 학교 울타리를 떠나 외부인에게 나의 연구 주제를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도 교수님은 "지역 학회이니 긴장할 필요도 없고 가벼운 마음으로 준비하면 된다"라고 했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임하는 것이 잘 되지 않았다. 내 연구 주제는 아무리 봐도 빈틈이 많은 것 같고, 질의응답 시간에 그 빈틈을 공격당할 것 같고, 발표를 준비하는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
어떤 일로 마음이 불안할 때마다 생각나는 문장이 있다. 아무런 장비 없이 볼더링 하듯이 높은 암벽을 오르는 프리 클라이밍의 대가 Alex Honnold가 한 다큐멘터리에서 한 말이다. 발 한 번 잘못 디디면 목숨이 날아가는 위험천만한 도전을 직업으로 하는 그가 한 말이어서 더 가슴 깊이 와닿았다. "자신감은 어떨 때 철저한 준비 (preparations)에서 나오고 어떨 땐 그냥 직감적으로 (gut feeling) 생기죠." 다큐멘터리를 보니 그의 자신감의 원천은 전자인 것 같았다. 로프 없이 클라이밍을 하기 전 발을 어디에 놓을지, 홀드를 어떻게 잡으면 좋을지 하나부터 열까지 계산하는 모습을 보고 철저한 준비를 통해 자신감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쫄보인 나는 직감에서 자신감을 찾지 않는다. 중요한 발표가 있을 때는 시간을 재면서 여러 번 연습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볼더링을 할 때 여러 번 연습한 자세는 몸이 기억하듯이 여러 번 연습한 문장은 머리와 입이 기억하고 알아서 움직이게 된다.
첫 학회 발표를 하고 느낀 것이 하나 있다면 질의응답 시간의 중요성이다. 내가 마지막 발표자여서 질의응답 시간이 다른 발표자보다 많았고, 그때 몇몇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내 연구 주제를 구체화시킬 수 있는지 좋은 의견을 전달했다. 내 연구의 부족한 점과 개선 방향을 정중하게 알려준 다른 학교 교수님 한 분에게는 발표가 끝난 뒤 따로 가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전했다. 연구 디자인 방법을 구체적으로 조언해 준 다른 교수님께는 오늘 따로 감사 이메일을 보냈다. 어느새 나도 이런 형식적인 인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구나... 이것이 사회생활 짬밥이다!!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다른 학교 출신 박사생 한 명이 있어서 그가 질문을 할 때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어딜 가나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무례한 질문에 정중하게 답하는 방법도 배웠다. 하지만, 약간 무례했던 그 질문자를 포함해서 내 발표를 끝까지 듣고 관심을 가져준 몇몇 안 되는 청중들 모두 고마웠다. 내 연구 주제를 불특정 다수 앞에서 테스트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다음 학회에는 완성된 연구를 가지고 와서 토론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박사 공부에 자극이 됐다.
지난달에 가장 친하게 지냈던 중국 친구 F가 베이징으로 돌아가 마음이 조금 허전한 나날들을 보냈다. 짧은 시간 아주 많이 친해졌는데 한국에 휴가를 가는 바람에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이별을 맞이해야 해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물론, 홍콩에도 좋은 친구들이 여럿 있지만 같이 힘든 수업을 같이 듣고, 도서관에서 열공하며 쌓은 우정이라 중학교 때 친한 친구가 전학 갈 때와 비슷한 감정이 밀려왔다.
어제는 지도 교수님이 같은 친구 J와 함께 저녁을 먹고 바닷가를 같이 걸었다. 서울과 달리 홍콩은 바다가 가까워서 참 좋다. 나보다 나이는 훨씬 어리지만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만나서 그런지 같은 걱정과 고민을 공유할 수 있어서 J와 이야기하면 여러모로 큰 위로와 도움이 된다.
오늘은 아침 11시 30분 요가 수업이 사전 공지도 없이 취소돼서 문 잠긴 요가 학원 앞에서 10분 넘게 기다리다가 헛걸음을 했다. 요가 학원까지 30분이나 걸려서 버스 타고 갔는데 조금 짜증이 났으나 뭐 어쩌겠는가. 나랑 같이 문 앞에서 기다리던 4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아저씨 한 명은 시간을 낭비한 게 아까워서인지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고, 자꾸 투덜거렸다. 땀으로 흠뻑 젖은 자기 티셔츠를 가리키며 "이것 봐. 기다리다가 더워서 땀이 이만큼 났다고"하며 나에게 투정을 부리셨다.. 저도 더워요 아저씨ㅠㅠ 학생이 된 뒤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서 시간에 항상 쫓기는 회사원이었으면 짜증이 날 만한 일들을 담담하게 넘길 수 있는 여유가 조금 생겼다. 그 아저씨는 아마도 점심시간 짬을 내서 요가 학원에 시간 맞춰 왔을 수도 있으니 나보다 더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겠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한창 조직에서 중간 관리자 역할을 하며 열심히 일할 30대 중반에 4년간 학생 신분으로 공부만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은 복된 일이다. 항상 바쁘게 쫓기며 살았던 삶의 태도를 바꾸고, 내 건강을 돌보고, 홍콩에서 시부모님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남편과 여행도 많이 하고 그렇게 일상을 즐기면서 공부하고 싶다. 최근 여러 가지 마음의 걱정이 많았는데 글을 쓰다 보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아침마다 "회사 가기 싫어요~~"라고 자기가 작사 작곡한 슬픈 노래를 (한국어로) 부르며 출근하는 남편에게 조금 더 잘해줘야지. 30대 박사생은 매일 아침 9시에 회사로 출근하는 이 세상의 모든 직장인을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