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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에 핀 꽃 한송이 Dec 04. 2023

잠들지 못한 밤

소소한 일상 에세이

잠을 청한다고 불을 끈 밤 11시경, 침대에 몸을 뉘이기 전까지만 해도 하품을 하며 취침 준비를 했지만 정작 누우니 정신이 또렷해진다. 아직 잠이 먼 길에서 오는 중인 것 같아 잠을 기다린답시고 핸드폰을 들고 SNS에 도배된 지인들의 아이 사진, 여행 사진, 맛집 메뉴 사진에 열심히 하트를 누르다가 저번에 살까말까 망설이며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트위드 원피스가 생각나 쇼핑 앱을 클릭했다. 그 원피스는 다시 보니 색상이 과하게 화려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다른 원피스들을 클릭해서 보다 보니 어느새 밤12시다.

신데렐라가 요정과의 약속때문에 벗겨진 유리구두도 미처 챙기지 못하고 도망갔다는 바로 그 12시, 핸드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잠이 왔다가 내 태도가 불량해보여서 다시 떠났나 싶어 잠이 올 때까지 눈을 절대 뜨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무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 하고 되뇌이니 아무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뇌가 성실하게 반복하고 있었다.

아뿔싸,

그러다 갑자기 과거의 흑역사들이 하나씩 기억나기 시작한다.

대구언니 결혼식날 곳곳에 구멍이 뻥 뚫린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가서 축의금으로 7만원을 봉투에 넣었던 기억에 에휴, 나도 몰래 한숨이 나왔다. 며칠 전 기껏 하객 패션을 검색해서 샀던 원피스는 당일 아침 거울 앞에서 입어보니 허리가 과하게 잘록해보이는 게 영 맵시가 나지 않아 결국 옷장에서 고르고 골랐다는게 찢어진 청바지인 그때의 내 뇌구조는 대체 어떤 것이었는지 다시 돌이켜보기도 싫었다. 축의금은 왜 하필 7만이었나, 5만은 보통 사이, 10만은 가까운 지인 사이에 주로 넣는 금액이라길래 나는 15만을 준비하기로 했다. 헌데 그 금액에서 왕복 KTX비용은 홀랑 빼고 7만을 넣은 것이다. 서른 즈음에 그만큼 미련하게 계산적이었다는 것과 대범하거나 따뜻하지 못했다는 것에 그때로 돌아가 이놈의 지지배 정신 좀 차리라고 엉덩이라도 힘차게 발로 차버리고 싶을 지경이였다.

흑역사 하나를 가까스로 흘러보내니 오늘 밤은 흑역사들을 기리는 밤이라도 되는 듯 보란듯이 두번째 흑역사가 버젓이 기억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다.

세번째 남친에게 이별통보를 받던 날 눈물을 질질 짜며 “난 이제 시작인데 넌 벌써 끝인거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라고 했던 멘트가 무려 5년전 일인데도 또렷이 기억나 나도 몰래 어휴어휴, 한숨을 쉬며 이불킥을 했다. 이제와 돌이켜보니 남자친구가 날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시점, 연락을 고의로 피했던 싸인들도 선명하게 있었는데 겨우 만난지 3개월차였으므로 난 한낱 감정싸움으로 생각했지 이별일 줄은 몰랐다. 눈치를 못 챘더라도 베트남쌀국수 한그릇 시켜주며 헤어지자고 말하는 그놈 앞에서 자존심이라도 지켰어야 했는데 한없이 촌스럽고 세련되지 못했던 그때의 내 모습에 안쓰러움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연애라는건 아름답게 말하면 서로의 세계에 초대받는 설레고 어메이징한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치열한 한판의 EQ대결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었다.

흑역사는 나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세번째로 고등학교 때 피자를 사주겠다며 친구를 데리고 동네 갓 오픈한 피자집에 갔다가 피자 값이 생각보다 비싸단 걸 알고는 계속 머뭇거렸더니 친구가 눈치껏 계산해버린 찌질한 기억이 떠오르자 도저히 못 참겠어서 아휴,아휴 가련한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뜨고 말았다. 고문도 이런 고문이 또 어디 있을까. 흑역사가 내 의지와 무관하게 한꺼번에 소환되는 건 스스로를 각성시키기 위한 장치라고 애써 마음을 진정했다. 30대를 넘어오며 딱히 기억에 남을법한 흑역사가 없다는 점을 상기하자 괴로움이 일순간 안도의 숨으로 바뀐다. 이럴 때는 나이를 충실하게 잘 먹어가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안도하게 된다.

다시 핸드폰 액정 화면을 쳐다보니 12시 반이다. 그리고 나는 갑작스레 새침해지면서 잠을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30분이나 눈을 감고 기다렸는데 그 기다림이 데려다 준 곳은 흑역사의 세계였으니 잠을 향한  구애도 이내 시들해졌다. 12시와 12시 반 사이, 시간이 자박자박 걸어서 돌다리를 건너듯 어제와 오늘의 선을 넘는 동안 나는 깨어있었다는 것에 기분이 묘했다. 쌔근쌔근 자는 아기에서 노곤함에 코를 골며 자는 삼십대 애 엄마가 되는 동안 만이천번도 넘게 똑같은 밤이 사계를 등에 업고 사뿐히 닫힌 나의 눈꺼풀 위에 내려앉았을텐데, 정작 내가 눈을 뜨고 맨 정신으로 홀딱 보낸 밤은 열 손가락 안에 들만큼 나는 어마어마한 잠꾸러기였다. 대학 입시가 코앞이어도 다음날 컨디션을 위한다는 핑계로 열두시를 넘겨 본적이 없었고 아무리 뜨거운 연애를 해도 밤새 핸드폰을 붙잡고 있는 건 질색이었으며 낮과 밤을 구분 못하는 영아 시절의 딸아이를 품에 안고 몇 번을 깼다 자기를 반복하며 몽롱한 상태로 밤의 어깨에 힘없이 기대어 있었다.

이제야 나는 제대로 깊어진 밤을 독대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밤이란 어떤 것일까, 가만히 귀 기울여보니 밖에서 이따금씩 들리는 차 소리와 내 옆에 누운 네 살 딸아이의 고운 숨소리가 화음처럼 섞인다. 깊고 깊은 어둠 속 별이 환하게 빛나고 귀뚜라미 소리가 이따금씩 들리던 시골 밤에 안겨 커왔던 나는 이제야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에 딸아이의 돌돌 말은 기저귀마저 형체가 뚜렷하게 보이는 도시의 밤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변하지 않는 건 밤 특유의 센티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내 심장소리를 의식하게 되고 내 숨소리가 귀에 꽂히는 이 정적에 나는 아무와도 연결되지 못하는 외로움을 약간 느끼기도 했고 오롯이 혼자이기에 깊은 성찰을 가능케하는 밤의 고독에 감탄하기도 했다.

이제 밤은 자정을 훨씬 넘어 한시인지 두시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졌다. 핸드폰 액정 화면의 시계를 쳐다보며 밤을 토막 썰듯 몇 시의 밤이라고 정의하지 않기로 한다. 밤은 아주아주 오래전 우주와 함께 숨쉬어온 태고적 존재였으므로 인간이 지금껏 열심히 만들어온 수천만년의 역사로 치마를 만들어 입고 무릇 생명이 있는 모든 자연과 인간를 아기 재우듯 매일 토닥이는 할머니 신일지도 모른다.

이 깊은 밤과는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뜻밖에 찾아온 귀한 손님을 세워놓고 다과를 먼저 내놓을까, 아니면 시원한 음료수 한잔을 먼저 건넬까 황망해하는 사람처럼 나는 어쩌다 찾아온 불면의 밤 앞에서 긴장해진다. 오랜 시간 불면증에 시달렸던 엄마는 밤이 오는 걸 두려워하셨다. 나같이 어쩌다 잠들지 못하면 긴 장문으로 글을 쓰며 밤을 편안하게 마주할 수 있지만 불면증을 앓는 사람들에겐 밤만큼 외롭고 두려운 건 또 없으리라.

엄마는 매일 밤과 씨름하셨다. 침대를 바꿔주고 베개 높이에도 예민하셨으며 창밖에 들리는 찻소리에 왜 우리 딸 집은 하필 도로변에 있을까 한숨을 내쉬기도 하셨다. 그렇다고 낮에 깊은 수면을 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어떻게든 밤에 잠을 자고 싶었던 엄마는 아이처럼 밤의 옷자락을 잡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을 때도 있었고 밤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할 때도 있는 것 같았다.어쩌다 두세시간을 깊이 주무시고 깨면 소녀같이 맑은 얼굴로 그렇게 기분 좋아하시던 엄마는 타고 나기를 예민한 성향때문에 힘들어하셨다.

나는 밤을 앞에 두고 매일의 밤이 나만큼 평화롭지만은 않았던 지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곱씹었다. 밤에게 내 지인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주며 이 사람들 잠을 잘 자게 해주십사, 간구를 하고 싶어졌다. 사실 두 다리를 뻗고 낮 동안 수고한 몸과 마음을 밤에게 맡기고 매일 온전한 쉼을 쉴 수 있다는것만큼 매일 한결같이 일어나는 감사한 일이 또 얼마나 더 있을까. 새벽이 희붐이 밝아오고 청소차가 쓰레기를 실어가는 소리가 들릴 때면 이 밤을 또 뜬 눈으로 꼴딱 새웠다는 것에 새삼 괴로워진다는 친구가 있었다. 내 귀에 청소차의 쓰레기 싣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나는 오랫동안 연락을 못한 국경 너머에 사는 그 친구가 생각이 났고 낮에 안부 연락을 한번 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새벽이 오면 슬슬 일어나 마치 아침을 맞는 것처럼 자신을 속이며 소리내어 세수를 하고 거실 쏘파에 앉아 티비를 튼다던 그 친구의 말이 기억나 나도 이제 정신이 점점 더 맑아지려나 싶었지만 어느샌가 의식이 몽롱해지며 내 의지와 무관하게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밤은 이제 새벽과 교대를 마치고 살며시 내 손을 놓은 게 분명하다.

새벽의 토끼잠은 깊고 달았다.

깨고 나서 여전히 컨디션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짧고 허기진 잠이 준 여운은 쉬이 가셔지지 않았다. 동면을 마치고 눈을 찌르는 햇살에 마지못해 눈을 뜨는 두더지처럼 엉금엉금 이불 밑에서 기어나와 이불을 개고 분주한 아침을 맞았다.

쉬이 잠들지 못했던 어젯밤은 떠나갔다. 나는 아마 간밤에 미루어두었던 잠과 씨름하며 길을 걸을 땐어떻게든 정신줄을 잡으려고 눈에 힘을 줄 것이고 잠깐 쉬는 동안은 잠과 타협하며 눈을 살포시 감을 것이다.

오늘 밤은 무수히 많은 밤들이 그러했듯이 잘 자야지, 다짐을 하듯 거울 속 핼쓱해진 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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