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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재형 딴짓마스터 Jun 02. 2017

아흔 살 할아버지와 환갑 똘똘이

사진가의 도시 #3

할아버지와 개, 경북 청송. 2017

할아버지의 아흔 한 번째 생신을 맞아 오랜만에 시골로 향했습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하셨던 할아버지는 지역에서 꽤 큰 과수원을 가꾸셨었죠. 어렸을 때 놀러 가던, 그리고 할아버지의 삶 그 자체였던 시골집은 지금 물속에 있습니다. 언제나 할아버지와 투닥거리면서도 옆을 지키셨던 할머니도 지금은 안 계십니다. 지금 할아버지 곁에는 '똘똘이'가 있습니다.


똘똘이, 경북 청송. 2017

똘똘이는 '무근본 믹스견'입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넌 어떤 계열이구나' 말할 만한 단서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조화롭게 섞인 친구죠. 똘똘이의 정확한 나이는 아무도 모릅니다. 시골집에 오기 전에는 따뜻한 집안에서 편안하게 살았다던데, 지금은 추운 겨울바람마저 바깥에서 맞는 신세가 됐습니다. 가족들이 짐작하는 똘똘이의 나이는 10살 내외. 사람으로 치면 환갑입니다.


할아버지와 개, 경북 청송. 2017
할아버지와 개, 경북 청송. 2017
할아버지와 개, 경북 청송. 2017

여름을 느낄 수 있었던 5월 마지막 주 주말, 고모가 땡볕이라고 걱정하며 말리셨지만 할아버지는 기어코 중절모 쓰고 산책을 나섭니다. 아, 아흔한 살 우리 할아버지께 중절모는 가장 중요한 패션 아이템입니다. 고령이시지만 외출하실 때는 꼭 정장을 빼입으시는 분. 중절모는 외출용, 작업용, 일상용 따로 구비하시는 분이 저희 할아버지입니다.


똘똘이도 신났습니다. 할아버지 말씀으론 '똘똘이가 이 시간을 제일 좋아한다'네요. 한껏 치켜든 꼬리와 경쾌한 발걸음. 앞서가면서도 할아버지 쪽을 틈틈이 쳐다보는 게 마치 '나만 믿으라'는 것 같습니다. 저도 덩달아 신납니다. 똘똘이가 이렇게 신난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었거든요.


할아버지의 산책로, 경북 청송. 2017
할아버지의 산책로, 경북 청송. 2017

똘똘이가 신난 모습을 볼 수 없었을 밖에요. 부끄럽지만 제가 할아버지와 단둘이 산책을 나간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죠. 적어도 제 기억 속에서는 그렇습니다. 어렸을 때야 개울에 발 담그며 하루 종일 놀았지만 지금은 다 큰 데다가 명절이랍시고 오면 피곤해서 뻗기 일쑤였으니. 네 물론 핑계입니다.


시골집 뒷길에 이렇게 고즈넉한 풍경이 숨어있었단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요?


할아버지와 개, 경북 청송. 2017

참전 용사답게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사진 찍으시려는데 똘똘이가 말을 안 듣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앞을 봐라' 거듭 말해도 카메라가 어색한 똘똘이는 뒤로 숨기만 합니다. 결국 할아버지는 줄을 슬쩍 끌고 와 손자가 든 카메라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느슨한 듯 팽팽한 목줄이 짧은 신경전을 보여줍니다.


할아버지와 개, 경북 청송. 2017
할아버지와 개, 경북 청송. 2017

밭길, 꽃길, 오르막길 어디서든 '환갑' 똘똘이는 산책 가이드 역할에 충실합니다. 혼자 흥분해서 치고 나가지도 않더군요. 할아버지는 찰떡같은 호흡을 믿고 날마다 기분 좋은 산책을 떠나시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저희 아버지도 올해 환갑이신데, 어쩌면 할아버지는 이 순간 아들과 산책하는 기분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할아버지와 개, 경북 청송. 2017
할아버지와 개, 경북 청송. 2017

누군가에게 함께 걸을 옆자리를 내준다는 것. 가족, 연인, 친구 때로는 작은 강아지 하나일지라도 자신의 감정을 교류하고 의지한다는 건 행복한 일입니다.


여름 햇살을 품은 5월의 어느 날, 둘의 N번째 산책도 끝이 났습니다. 할아버지는 오늘도 저 회색 중절모를 쓰고 걸으실 겁니다. 내일도, 모레도 말이죠. 걱정은 되지만 할아버지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날도 어느 날도 할아버지 옆에는 똘똘이가 함께할 테니까요.



'사진가의 도시'는 제가 사는 매력적인 도시 서울의 순간과 여행하면서 만난, 만나게 될 다양한 공간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사진가의 도시'는 어디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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