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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재형 딴짓마스터 Mar 23. 2017

틀딱과 급식충이 사는 세상 2

초딩이 자라서 급식충을 욕하다

※모든 사진은 특정 용어와 관계없습니다.


교복 입은 내가 본 초등학생들
교복 벗은 내가 본 고등학생들


교복을 처음 입었다. 3년 입어야 한다고 손목을 뒤덮은 소매가 바보 같았다. 그날 난 최고참 초등학생에서 새내기 중학생이 됐다. 다니게 된 중학교는 여유롭게 걸으면 30분 정도 걸렸다. 초등학교 등교 때에 비하면 두 배 정도. 멀리 걸을 수 있는 시간만큼이나 부쩍 자란 기분이었다. 비록 옷차림은 초등학생 때보다 꺼벙해 보였지만.


3년 후, 고등학생이 됐다. 꽤 규모 있는 재단에서 운영했던지라 중학교도 같이 붙어 있었다. 오후 3시쯤 복도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면 중학생들이 하나 둘 교문을 나섰다. 그 친구들이 참 아이 같아 보였다. 대학생이 돼서는 교복을 벗어버린 홀가분함만큼 교복 입은 꼬맹이들과 다른 세상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일부지만,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에 태어난 이들은 ‘최초의 초딩’이었다. 이전에도 어리게 보는 시선은 있었겠지만 대놓고 낮춰 부른 시점이 이때다. 초등학생 때를 되짚어 보면 딱히 초딩이라는 말을 들은 기억은 없다. 중학생이 되자 몇몇 친구들이 사용하기 시작해 고등학교 진학할 때쯤은 일상어나 마찬가지가 됐다.


촛불집회 현장에서 스마트폰을 하며 걸어가는 아이는 비정상인가?


급식충의 등장


비하 발언이지만 ‘초딩’의 어감은 그래도 귀여운 면이 있었다. ‘초딩·중딩·고딩·대딩·직딩’은 한편으로 단순 줄임말이기 때문이다. ‘급식충’은 다르다. 용어 자체에 비하 의도가 가득하다. 2011년 후반 ‘일베충’이 이슈가 돼 한남충, 맘충, 메갈충, 진지충, 설명충, 따봉충, 학식충, 급식충으로 파생됐다. ‘벌레 사회’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급식은 학교에서 식사를 공급하는 행위일 뿐이다. 학생 대다수가 누리는 서비스다. 급식에 ‘충’이 붙으니 선의의 피해자가 생긴다. 일부의 문제를 ‘성급한 일반화’로 대응한 셈이다. 급식충이 특정 커뮤니티를 지칭하는 일베충, 메갈충과 다른 이유다.


“무개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표현일 뿐이다”라는 의도는 중요치 않다. ‘급식충’이라 부른다고 그 학생의 태도가 나아질 리 없다. 그냥 분노다. 모호한 표현을 만들어 애꿎은 피해자를 내느니 문제 일으키는 대상을 콕 집어 욕 한번 해주는 게 차라리 낫겠다.


나이의 오만은 멀쩡한 아이들을 억누르는 폭력이 될 수 있다.


억울하면 일찍 태어나든가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시간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재수생 후배가 들어오면 장난 삼아 “억울하면 제때 들어오든가”, 나이 들어 군대 가면 한두 살 어린 선임이 “억울하면 일찍 들어오든가”라고 하는 것처럼. (내가 들어봐서 이러는 건 아니다. 과연) 한국에서는 시간이 당신과 내 사이를 규정하는 큰 기준이 된다.


몇 년생이냐, 몇 학번이냐, 무슨 띠냐. 그럼 내가 형이네, 언니네.

결국 묻고 싶은 건 “넌 몇 살이세요”

시간이 관계와 만나는 결과물. 모두 알다시피 ‘나이’다. 


‘자란다’는 개념은 작은 존재가 큰 존재로 거듭나는 것. 미숙한 존재가 성숙한 존재로 나아가는 걸 말한다. 시간의 축에서 ‘자란다’는 과거의 존재를 작고 미숙한 것으로, 미래의 존재를 크고 성숙한 존재로 규정한다.


흔히 ‘크다, 성숙하다’는 정상으로 여겨진다. 작고, 미숙한 것은 비정상으로 간주되곤 한다. 좀 더 오랜 시간을 살아온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미성숙한 면이 있을 텐데도) 스스로를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의 오만이다. 이런 자기합리화는 '틀딱적 사고방식'과 다르지 않다.


조금 자라 중학생이 된 나는 고작 1살 어릴 뿐인 초등학생들을 어리게 봤다. 좀 더 자란 대학생은 고등학생들이 작게 느껴졌다. 대학생이 10살 어린 초등학생을 본다면, 30대가 된 지금 나보다 20살 어린 친구들을 본다면? 나는 그들을 동등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못할 것도 없지만 한편으로 부자연스럽다.


시간의 오만. 나이의 오만. 배려가 필요하다.

꼰대와 틀딱은 아이들의 미래가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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