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월의 파도가 육지를 덮치지 못하는 데에
목욕탕에서 나도 모르게 쌓인 살갗의 때를 벗기듯
떠나오면 초미세먼지같은 파편들이 낯선 땅의 바람에 날린다.
서울에서 불필요한 힘은 빼고 살고자 했건만,
그럼에도 간헐적 대청소는 필요한지.
비가 그쳤으니 아무래도 숲이 좋겠다.
잔가지들이 스치는 소리에 다 내려두자.
비자림의 나무들은 그 곳에 몇 백년을 머무르며
볕을 따라 제 손을 길게 뻗어냈다.
그 뻗은 손들이 산책로 위를 감싸니
길을 걷던 여행자는 나무가지 사이로 반짝거리는 햇볕에 속수무책이다.
「똑똑똑똑똑똑-」
딱따구리 소리에 잠시 멈춰섰다.
반복되는 리듬은 어떤 신경을 자극했는지,
한번 숨을 크게 들어마시며 눈을 감았다.
그 어떤 생각이 들지 않게끔.
숲을 지나서, 날아가는 한 무리의 새를 쫓아 달려간 곳엔,
어제와는 사뭇 다른 바닷가가 있었다.
「애월」
그 차가운 겨울 바닷바람에도 푸릇한 취나물밭이 반가웁고,
한 때 이 섬을 지키던 연대는 이제 설명판 하나에 제 모든 시간을 의지했는데,
전해져 내려오는 그 이야기는 더 이상 큰 감명을 주지 못할 법하다.
단지 그 돌에 잠시 기대어 한 박자 쉬어갈 수 있는 작은 쉼터일지라도,
그것만으로 연대에게는 존재의 이유일테다.
이윽고 도착한 포구에는 꼬챙이에 걸린 오징어 뒤로 하늘에 구름이 비추었고,
한 눈에 봐도 걷기에 손색이 없을 바닷가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그러다가 산책로 중간 어느 높은 바위에 올라가 앉아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봤다.
파도는 대체 왜 넘지도 못할 육지로 자꾸 자신을 던져 산산조각날까.
하는 수 없이 바람에 밀려온다고는 하지만,
이 변화없는 반복됨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파도를 보면서 떠오르는 것들이 많았다.
파도가 만들어내는 굉음과 그 바닷바람과, 서늘한 온도에
모두들 말을 잃고 경이로운 눈빛으로 파도를 쳐다본다.
정열인건가.
그 경이로움은 결국 정열이었던 것 같다.
끊임없이 제 몸을 던져 부서지는 한결같은 정열은
보는 이의 혼을 빼놓는 것 같다.
시간이 다소 걸리지만 그 꾸준한 반복됨은 여태껏,
아름다운 해안절벽을 만들었고, 모래사장을 만들었다.
그가 오랫동안 남긴 유산 위에, 다른 삶들이 촘촘히 모여있다.
모든 것이 지루해져가고 크게 새로울 것이 없던 무렵,
평온 속의 작은 움직임들이 영혼을 꾹꾹 눌러댔던 건,
아직 그렇게 속단하기엔 이르다는 신호였던지.
뻔하다는 생각과 당연하다는 생각, 그러니까
스스로를 편안하게 다스리기 위한 보호 장치들은 벗어놓고.
더 날 것의 상태로 하루를.
아직 살아야 할 날들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