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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Oct 29. 2023

잔여온기

겨울로까지 가는 길, 북해도 #2

이튿날 아침, 암전된 방에 별안간 밝은 빛을 받아낸 건 다름 아닌 커튼을 연 J이었다. 전날밤 노천온천에 다녀온 후 작은 건조대에 걸어놓은 하얀 수건마저 간밤에 성의껏 방을 덥힌 온기로 빳빳하게 말라 있었던 아침. 눈을 떼자 마자 밀려오는 극심한 갈증에 생수를 벌컥 들이켰다.


취침 중 채 빠져나가지 못한 취기에 간밤에 문을 잠근 채 잠이 든 L은 이불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연거푸 고개만 흔들었다. 그가 잠든 사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른 채.  그리고 잠긴 문을 가까스로 열고 들어온 후에도 J와 나는 맥주를 더 마셨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그렇게 오고 간, 간밤에 벌어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 낯선 겨울섬에서 처음 맞는 아침이었다.





날이 밝고 다시 찾은 노천온천. 짙은 청색의 토야 호수는 물결 하나 없이 고요한 가운데, 호수 중앙의 나카노시마 섬을 배경으로 알맞게 덥혀진 온탕에 드러누웠다.


어젯밤 어둠이 내리기 전 채 피신하지 못했던 호수의 온기들은 서늘하게 식어 눈덮인 토야산 중턱에 안개로 남아있었다.


날이 밝고 나서야 새삼 깨달았다. 하루 사이에 겨울에 물들어가는 어떤 환상의 섬에서 잠시 삶의 궤적을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 토야호를 빙 감싸던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호수 가운데 봉긋 솟은 나카노시마 섬은 마치 먼 길을 떠나는 주인을 한없이 바라보는 강아지처럼 우리의 시야를 떠날 줄을 몰랐다. 산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도로로 꺾기 전까지는.


완만한 구릉을 한참을 올라 어느 순백의 평원이 보이자 잠시 차를 세웠다. 그곳은 여름에 젖소들이 한가로이 노니는 목장이었다. 추워지기 전 소들이 한껏 힘을 짜낸 우유로 만든 소프트 아이스크림은 고소함과 부드러움을 최선을 다해 머금고 있었다.


들판 저 편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손을 꼭 잡고 걷고 있던, 잔잔한 온기가 남아있던 어느 한 목장이었다.






쌓인 눈에 눈부시게 반사되던 그 날의 햇빛에 문득 눈에 띄던 어느 노천온천의 푯말을 차마 지나칠 수 없었다. 아무리 씻어내도 도통 깔끔하게 씻겨 내려가지 않던 어떤 노폐심으로 말미암아 나는 유황냄새가 코끝을 은은하게 더듬던 열탕에 또 다시 몸을 담구었다.


가슴 아래로 밀도있게 몸을 감싸던 따뜻한 온천수의 힘을 빌려 찬 공기를 마주한 입가로 깊고 굵은 날숨이 느린 템포로 입김을 만들어냈다. 혹여나 미량이라도 남아 있을 낡고 소용없는 온기들을 모두 날려보내기 위해.


너무 차갑게 식지는 않게, 그동안 적재된 마음 속 열기 중 비워내야 할 마음만을 솎아 내보내는 것은 꽤나 복잡한 작업이었다.




스키를 좋아하는 L을 위해 온천 후 온천 근방에 있던 스키장으로 향했으나 날씨가 꽤 따뜻했던 탓에 스키장은 영업을 하지 않았다. 청명한 겨울 하늘에 한껏 들떠 있던 L은 아쉬운 기색을 차마 숨기지 못했다.


이따금 누군가의 과한 친절과 배려에 지치고 부담스럽듯 따뜻함은 언제 어디서나 환영 받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스키 장비까지 트렁크에 알차게 실었던 L의 씁쓸함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들판에 쌓인 눈의 표면은 볕에 녹아 몽글몽글 수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고개 너머 저 편에 작은 마을과 바닷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날의 목적지였던 이와나이 마을이었다.


마지막 고개를 넘어가는 길 흘러나오던 그 노래는 처음 듣는 노래였지만 노래가 끝난 후에도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마치 그 날 우리를 감쌌던 수많은 온기들을 향한 긴 여운과도 같이.


The warmest night, I ever felt

I spent with you

The fireflies, they multiply

Escape from view

- Haux, ‘Ricoch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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