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미술관에서 만난 부부의 순간
1. 사랑의 시작
이 그림은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젊은 남자는 술병을 쥔 채 와인을 음미하는 여인을 바라보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은 와인의 향을 코끝에 전해져 줄 것만 같다.
이 작품은 17세기 플랑드르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 베르메르가 남긴 40여 점의 풍속화 중 한점인 <포도주 잔(Glass of wine)>이다. 그의 작품은 인물들의 감정뿐만 아니라 섬세한 실내 묘사로 17세기 네덜란드 사람들의 일상을, 마치 해상도 좋은 스틸 사진처럼 잘 보여준다.
사적인 공간에서 함께 와인을 나누는 이 커플은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이거나 한창 사랑이 무르익어가는 연인처럼 보인다. 여인의 핑크빛 드레스와 향기로운 와인은 사랑의 설렘과 달콤함을 전해주고, 모자에 숄까지 두르고 지켜보는 남성의 모습은 연인을 향한 진지한 태도를 드러낸다.
창문에 새겨진 스테인드글라스는 ‘절제(Temperantia)’의 알레고리다. 와인의 달콤함과 절제의 긴장은, 사랑이 주는 즐거움 속에도 언제나 책임이 따름을 은근히 일깨워주고 있다.
2. 제도 속으로
제목이 말해주듯, 이 그림은 개신교 목사인 남편과 그의 아내를 그린 2인 초상화이다. 마틴 루터에 의해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한 플랑드르 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교회 제단을 장식하던 화려한 그림과 조각들이 우상숭배로 여겨져 금기시되고 교회미술이라는 큰 시장을 잃은 화가들은 자연스레 실내를 배경으로 한 풍속화와 정물화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 그림은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화면 왼편 설교대 위에 펼쳐진 성경은 촛불 아래 환하게 빛나고 목사인 '코넬리스'는 아내를 향해 성경의 가르침을 열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실제로 네덜란드 사회에서 꽤 영향력 있는 목사였는데, 화려한 언변보다 내적 진실성을 강조하는 설교로 이름을 날렸다. 17세기 네덜란드 사화에서 여성의 지위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법적지위와는 별개로 가정 내에서는 막강한 권한과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남편의 설교에 경청하는 그림 속 아내의 모습은 순종적인 여성상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그녀의 지적인 호기심과 침착한 태도는 당시 사회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경건하고 책임 있는 가정의 주인'이 어떤 모습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3. 내 할 만큼 했다 아이가!
이 작품의 제목은 <늙고 다투는 가난한 부부>. 작가는 알려져 있지 않고 1400년대 네덜란드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밀랍화이다. 작은 노트 크기의 이 그림을 베를린 보데미술관(Bode-Museum)에 보았을 때, 나는 조용한 미술관 안에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늙은 아내는 헝클어진 머리에 속옷을 입다 말고 다짜고짜 화를 내고 맞은 편의 남편은 고개를 숙인 채 홀쭉한 돈주머니를 쥐고 있다. 시장에 내다 팔고 받은 물건값이 형편없이 적었거나 집에 오던 길에 술 한잔 걸치느라 그 돈마저 다 써버려서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 가난한 부부는 오랜 세월 헤어지지 않은 채 함께 늙어가고 있다.
서로의 단점을 낱낱이 알고, 상대를 결코 내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십 년 함께 살아가는 결혼생활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격 수련의 장이자, 새로운 차원의 자아가 열리는 체험이다.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땐 웃음이 나왔지만, 한발 떨어져 다시 보니 가난한 노부부의 일상을 감싸고 있는 우아한 프레임에 눈이 갔다. 탐스러운 꽃과 열매, 그리고 나뭇잎들이 정교하게 조각된 액자는 돈 몇 푼에 삿대질하고 싸우는 이들의 부부싸움 마저 우아하게 감싸주는 듯했다. 사는 건 원래 그런 거라고, 우리는 신화 속의 영웅이나 여신은 아니지만 불행과 절망을 수없이 넘으며 늙어가는 인생도 상 받을 만한 의미가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4. 제도 밖에서
부부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는 기쁨보다 고통의 순간에 더 선명해진다.
사진 속 두 인물은 바로 그런 관계의 본질을 드러낸다.
두 사람은 상처와 불안 속에서도 서로를 붙들며 살아가는 삶의 동반자로, 전통적 성별구도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서로의 삶을 지탱한다.
우리 시대의 다양한 사랑과 상처, 고통의 연대기를 사진으로 기록해 작가 낸 골딘은 질과 가스초(Gill and Gotscho)>의 사진을 통해 동반자의 의미를 새롭게 일깨워준다. 부부라는 인간관계는 법적인 결합이나 자녀의 유무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고통과 욕망을 얼마나 이해하고 공유하느냐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5.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오랜 세월 함께 해온 부부는 성격도 생김새도 어딘지 모르게 닮아있다. 향을 싼 종이에 향내가 묻어나듯 못난 점도 잘난 점도 서로에게 옮겨간다.
거친 질그릇에 담긴 삶은 완두콩을 먹고 있는 이들은 한눈에 봐도 힘겨운 노동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는 게 역력하다. 술지게미와 겨로 끼니를 때울 만큼 어려운 시절을 함께 헤쳐 나온 아내, 이 그림은 프랑스판 '조강지처(糟糠之妻)'와' 조강지부(糟糠之夫)'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프랑스 화가 '조르쥬 드 라 투르 (Georges de La Tour)'의 <완두콩을 먹는 농부 부부>는
먼지바람이 인 듯 뿌연 화면과 절제된 색감을 통해 오랜 세월 이 부부가 살아온 소박하고도 경건한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글을 닫으며
이 글을 쓰며 사람들은 왜 결혼을 하게 되는 걸까 생각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결혼한다고 얘기하지만 사실 결혼생활은 편안하거나 행복하기 어려운 선택이다. 책임져야 할 자식이 생기면 그들을 키워야 할 의무를 다하느라 나의 욕망을 미루고 양보해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아이러니하게도, 힘든 줄 알면서도 사랑과 관계를 택하는 건 우리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다르게, 잘할 수 있을지도 몰라”라는 젊은이의 기대는 용기와 희망의 다른 말이다. 그리고 그 깨끗한 무모함이 우리의 삶을 계속 이어지게 만드는 힘이다.
힘들게 오른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에 멋지다고 감탄하는 서람도 있고, 배고프고 다리 아프다며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자신이 좋은 선택을 했는지 아닌지는 본인만 알 수 있고 그 평가 역시 오로지 본인이 누릴 몫이다. 그러니 우리 만약 다음 생에 태어난다면, 모두 이번 생의 경험을 살려 부디 더 멋지게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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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조르제트의 숟가락
5화: 성모에서 산모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