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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 젊음의 샘, 우리의 마음 안에 있다

칠순의 화가가 전하는 청춘의 비밀

by 루씨

자연의 힘을 거스르는 데는 특별한 힘이 필요하다. 특히 늙고 병들어가는 노화 현상을 인간은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고 꺼려한다. 말 한마디로 세상을 무릎 꿇게 만들었던 동서고금의 왕과 황제들도 자신이 늙고 병들어가는 것만큼은 피할 수 없었으니,
'피할 수 없으면 늦추자'는 요즘의 '저속노화' 트렌드는 평균수명 백세 시대에 따 맞아 떨어지는 대응법인 셈이다.

여기, 젊고 아름다운 육체에 대한 열망이 21세기 만의 특징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16세기 독일 르네상스 시대의 인기화가 루카스 크라나흐의 <젊음의 샘물>. 커다란 사각형 풀의 중앙에는 젊음의 샘물이 솟아오르는 분수가 놓여있고, 그 좌우로 늙음에서 젊음으로 전환되는 삶의 역전이 극적으로 묘사돼 있다.


<젊음의 샘물> 1546/루카스 크라나흐 (베를린 국립회화관)

화면의 왼편에는 늙고 병든 여인들이 수레에 실려 오고 있고, 오른편에는 젊음의 샘에서 목욕하고 난 후 젊음을 되찾은 여인들이 있다. 쭈그러들었던 가슴은 팽팽해지고, 마르고 거칠던 피부는 도자기같이 매끈해졌다. 목욕을 마친 여인들이 긴 머리칼을 올려 묶으며 붉은 텐트 속으로 들어간다. 그 안에서 화려한 드레스와 화장을 마친 여인들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바로 멋진 식탁이 차려진 숲 속 연회장이다.
그들은 잘 차려입은 귀족 남성들과 함께 춤을 추고 산해진미를 즐기며 즐거운 대화를 나눈다. 젊음과 함께 죽어가던 감각이 되살아나고 신선한 쾌락이 주위를 감싼다.
마치 고려장을 기다리는 듯 수레에 실려있던 노파들이 지팡이를 짚고 내려오는 장면과 비교해 보면 젊음이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과 활력은 빼앗기기 싫은 매력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그림은 젊음과 늙음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몸에서 일어나는 다른 현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리고 회춘한 이들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을 눈여겨보자.

금빛 촛불 아래 은쟁반에 올려진 구운 꿩과 진한 향의 와인, 달콤한 과일이 넘쳐나는 연회장이다. 연한 장밋빛 피부와 반짝이는 머리칼을 되찾은 여인들이 향수 냄새를 풍기며 걸어 들어오고, 그 맞은편에는 비단 옷을 차려입은 젊은 남성들이 미소를 띠고 기다린다. 곧 음악이 흐르고, 살결이 스칠 만큼 가까운 춤사위와 낮은 웃음소리, 잔을 부딪히는 맑은 소리가 뒤섞여 쾌락의 장이 펼쳐진다.
그러나 이들 역시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노인이 될 테니, 아무리 젊어진다 해도 육체의 쇠락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이 그림이 크라나흐가 거의 70대 후반, 생애 말기에 제작한 작품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작품의 메시지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당시 유럽에는 연금술, 불사의 묘약, 젊음의 샘 같은 불로장생에 대한 상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크라나흐는 영생에 대한 욕망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사실 그 목적은 쾌락과 허영을 쫓는 인간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는 성찰을 전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언제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할까. 만약 젊음의 묘약을 꿈꾼다면 바로 지나온 삶에 후회가 떠오르는 그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 삶에 필요한 건 젊은 육체가 아니라 삶을 향한 새로운 시선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우리에게는 새롭게 보고 다르게 살 수 있는 '젊음의 샘물'이 늘 곁에 있다는 사실 말이다.


진정한 발견의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데 있지 않고,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 (Marcel Proust, 1871–1922)


루카스 크라나흐 (Lucas Cranach, 1472-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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