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을 지탱하는 힘에 대하여
우리는 대체로 이미 익숙해져 버린 질서에 대해서는 잘잘못을 논하지 않는다. 반대로 변화가 필요한 때라도 낯선 것이라면 지극히 보수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게 된다. 하지만 삶에 방향 전환이 필요하거나 해답을 찾을 수 없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신박한 해결책이 아니라 익숙한 것에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그게 정말 맞는 것일까'
르네 마그리트(1898~1967)는 이 분야의 독보적인 화가이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마치 간밤에 꾼 꿈의 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 듯하다. 뭉게구름이 가득한 새의 날개나 열린 창문을 통해 밀려들어 올 듯한 바닷물, 밤과 낮이 동시에 펼쳐진 숲 속의 저택 등 앞뒤가 맞지 않는 낯선 이미지들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동시에 낯선 질문을 던지게 한다.
사실 마그리트의 그림에 자주 나오는 하늘과 새와 여인, 그리고 사과 같은 사물은 새로울 것이 없지만 그의 그림이 기이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익숙하고 평범한 사물들이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공간에 배치되어 새로운 상상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마그리트는 나무 꼭대기에 있을법한 새 둥지를 성벽 위에 위태롭게 놓아두고, 담배파이프를 허공에 띄워둔다.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벽에 세워진 계단과 마루에서 솟아난 거대한 손가락은 지금까지 우리의 일상을 떠받치고 있던 단단한 믿음에 물음표를 던진다.
그가 말년에 그린 <피사의 밤>에는 거대한 숟가락이 기우뚱한 피사의 사탑을 받치고 있는데, 숟가락을 치우면 탑은 곧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이 탑은 피사성당에 딸린 종루로, 약한 지반 탓에 건축 후 수백 년 간 기울어진 채 서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높이는 55m로 탑이 세워진 12세기에 이 정도 높이라면 초고층 빌딩쯤 되었을 것이다. 가톨릭의 권위와 신기술이 만나 지어진 이 탑이 세상의 권력과 질서를 대변한다면, 숟가락은 일상을 떠받치는 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마르그리트는 말년에 뉴욕의 모마(MoMA)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가질 만큼 거장의 반열에 올랐지만, 젊은 시절 에는 광고포스터와 잡지 표지를 그리며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무명화가에 불과했다. 2차 세계대전까지 겹쳤던 오랜 무명시절 동안 그가 붓을 꺾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의 아내 조르제뜨 덕분이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예술가들에게는 늘 영감을 주는 '뮤즈'가 있었다. 하지만 예술가의 아내이거나 연인이었던 그들은 잠깐 뮤즈로 소비되었을 뿐, 자신의 재능을 꽃피웠다거나 두 사람이 깊고 원숙한 관계로 나아갔다는 서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마그리트와 조르제뜨의 관계가 더욱 특별하고 귀하게 다가온다.
스무 살 무렵 조르제뜨를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 마그리트는, 결혼 후 그녀를 모델로 삼아 수많은 작품을 탄생시켰다. 두 사람은 60여 년 동안 집과 작업실을 함께하며, 일상의 소소한 순간부터 예술적 영감까지 함께 나누고 의지했다. 조르제 뜨는 마그리트의 가장 솔직한 관객이자 비판자였고, 마그리트는 그녀의 삶과 감정을 작품 속에 담아 서로의 존재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마그리트의 그림 속에는 그들이 함께 나눈 기쁨과 불안, 창작의 고통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그림을 통해 세상에 없던 이미지를 창조하고 철학적 질문을 던진 마그리트는 마침내 세상으로부터 부와 명성을 얻었고, 그의 작품은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작업을 이어갈 수 있었던 힘이 결국 아내와 함께한 일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다시 <피사의 밤>으로 돌아가보자.
서로를 받치고 있는 탑과 숟가락은 매일 밥상을 나누며 건넸던 조르제뜨의 따뜻한 손길과 조용한 지지를 상징하고 기울어진 탑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마그리트 자신의 불안정함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이 그림은, 어둡고 길었던 무명 시절을 함께 견디며 서로의 삶과 꿈을 지켜온 조르제뜨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그들이 함께 일구어온 삶과 예술의 기록이다.
아무리 높고 큰 목표, 사회적 성취를 꿈꾼다 해도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는 함께 밥을 먹고 일을 하며 살아내는 시간일 뿐이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점점 기울어져 가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잠시 힘을 빼고 부엌으로 가 정성스레 밥을 지어먹어보자.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높은 이상과 목표란 결국 가까운 이들과 나누는 즐거운 삶을 위한 것이며, 모든 성취는 하루하루를 무사히 살아낸 대가로 주어지는 소득임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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