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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 젊음을 유혹하는 늙음

왜 요정들을 노파의 유혹에 넘어갈까

by 루씨
<베툼누스와 포모나> 1613 /Hendrick Goltzius

암스테르담에 있는 라익스 뮤지엄은 네덜란드의 국립미술관이다. 라익스(Rijks)는 '국가(state)'를 뜻하는 네덜란드 어니까 라익스 뮤지엄은 우리나라의 국립박물관의 위상이며, 16세기 이후 네덜란드 황금기의 회화 중심이라는 점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과 덕수궁미술관을 합쳐놓은 것과 비슷하다.

위 작품은 라익스 뮤지엄 2층 첫 번째 전시실에서 만난 <베르툼누스와 포모나>인데, 로마신화에 나오는 계절의 신 '베르툼누스'와 정원의 요정 '포모나'가 만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신화 속 이야기를 그린 작품들에는 여신이나 요정의 이름으로 젊은 여성 누드가 자주 등장한다. 이 그림 역시 그런 많은 작품 중 하나겠거니 하며 지나가버릴 뻔했다가 다시 발걸음을 되돌리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젊은 여성 옆에 바싹 붙어있는 노파 때문이었다.

흰 두건을 쓴 노파는 풍성한 천으로 만든 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고, 포모나는 자신이 돌보는 나무에 비스듬히 기댄 채 젊은 육체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또 자신의 속마음을 감춘 채 그녀를 꾀어내려는 노파의 집요한 눈빛과 과일과 나무를 가꾸는 일 밖에 관심이 없는 포모나의 눈빛은 대조를 이룬다.


화면 속 두 인물의 극적인 외모 대비는 묘한 긴장을 불러일으키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낯익은 설정이기도 하다. 늙은 방물장수에게 속아 죽다 살아난 백설공주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그림 속으로 들어가 '저 할망구 말에 속으면 네 인생 망한다'라고 말해 주고 싶은 심정이 된다.

로마신화에서 나오는 숲의 요정 포모나는 수많은 남성들의 구애를 받았지만 오로지 정원 가꾸기와 과일나무를 키우는 데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림 속 포모나의 오른손에 들린 작은 낫과 아래쪽에 놓인 싱싱한 과일들은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장치들이다.

피리를 기가 막히게 연주하는 목신 판도, 남성미를 뽐내는 사티뤼스도 포모스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했지만, 계절의 신 베르툼누스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변신을 거듭해 가며 포모나에게 접근했다. 그러다 포모나의 마음을 돌리게 만든 게 바로 노파로 변신했을 때였다.


신화 속 이야기는 포모나가 베르툼누스와 결혼한 이후 자신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성숙에 이르게 된다는 성장의 관점에서 펼쳐지지만, 나는 왜 베르툼누스가 노파로 변신했을 때 포모나를 설득할 수 있었을까가 궁금해졌다.


노파는 먼저 포모나에게 다가가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한다. 그리고 정원에 있는 그녀의 포도나무 넝쿨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저렇게 멋진 포도나무도 느릅나무가 없다면 땅 위에 늘어져 열매를 맺지 못했을 겁니다. 느릅나무 역시 포도나무가 없다면 쓸데없는 잎사귀만 달고 있었겠죠." 이렇게 구슬리는가 하면, 청혼자에게 차갑게 굴다가 아프로디테 여신의 벌을 받아 돌이 되어버린 여인의 이야기로 은근슬쩍 겁을 주기도 했다. 더구나 계절의 신이라면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과일나무를 가꾸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충고도 빠뜨리지 않았다.


젊음의 에너지는 집중과 몰두에 능하지만 전체를 읽는 힘은 약하다. 그에 비해 경험이 많은 노인들은 상대의 약점과 자신의 강점을 파악한 후 어르고 달래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을 끌고 갈 수 있다.

그래서 때때로 노인의 탐욕은 젊은이보다 훨씬 더 속물적이고 집요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대 간의 갈등이란 권력과 욕망을 두고 벌어지는 젊음과 늙음 사이의 줄다리기인 경우가 많다.


화가가 묘사한 노파의 모습에는 노인이라는 외피를 쓴 남성적 욕망, 탐욕, 교활함이 드러난다. 그에 반해 젊은 포모나는 젊음의 무지와 순수함을 대변하고 있다.

그림을 보던 나는 그제야 내 나이를 가늠해 본다. 더 이상 젊지는 않지만 아직 노파가 되지는 않은 나이. 이제 자연스레 '어떤 노인이 되어야 할까'를 자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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