램브란트의 빛과 바니타스 정물화
헤이그에 있는 '마우리츠 하우스 미술관'은 램브란트, 베르메르 등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 화가들의 대표작들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올봄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 미술관 로비에 마련된 포토존에는 베르메르의 <진주귀고리를 한 소녀>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각국에서 온 여성 관객들은 마치 드레스 코드를 맞추기라도 한 듯이 물방울 모양 진주귀고리를 착용하고 있었다.
요즘처럼 변화가 빠른 시대에 오래된 그림 한 점이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는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고대 그리스의 의사 히포크라테스는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예술'은 숙련된 외과 의술이었다고 하지만, 인생의 무상함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예술은 의술을 넘어서는 듯하다.
램브란트의 <닥터 튈프의 해부학 수업>은 미술관 1층 중앙전시실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림이 놓인 위치와 섬세하게 조도를 맞추어놓은 조명만 보아도 미술관 측이 이 작품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또 당장 미술관의 조명이 모두 꺼진다 하더라도 이 그림만은 여전히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을 것 착각이 들만큼 빛을 다루는 램브란트의 솜씨는 뛰어났다.
램브란트가 활동하던 1600년대 초반,
네덜란드에서는 종교개혁으로 개인의 이성과 노동을 중시하는 칼뱅주의가 국교로 자리 잡았고 이는 상업과 과학의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다.
<튈프박사의 해부학 수업>은
외과의사 길드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작품으로,
이 그림에서 해부를 시연하는 뷜프 박사와 이를 쳐다보는 의사들은 네덜란드 사회를 이끄는 대표적인 지식인들이었다. 시신의 팔 근육을 가위로 들어 올리며 해부를 시연하는 트리프 박사의 눈빛과 이를 쳐다보는 의사들의 표정에는 이성과 과학을 신봉하는 지식인의 자긍심이 가득하다.
램브란트 연구 논문에 따르면,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처형당한 범죄자들의 시신을 이용한 해부학 강의가 열렸으며 일반인들에게도 공개되는 연례행사였다고 한다.
해부용 가위에 열린 시신의 팔 근육은 핏기 빠진 피부와 대조를 이루고, 입을 벌린 채 굳어있는 데스마스크는 지적 호기심에 찬 의사들의 불그스레한 얼굴과 극적인 대조를 보여준다. 삶과 죽음을 관장하듯 시신의 근육을 들어 올린 채 강의하는 뷜프 박사의 표정은, 마치 종교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과학과 이성의 시대를 선포하는 듯하다.
그림 속 시신도 해부용 침대에 뉘어지기 얼마 전까지는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었을 테고, 생생한 표정으로 해부학 강의에 집중하는 의사들 역시 언젠가 숨을 멈추게 되었을 거라고 상상하니 새삼 모든 살아 숨 쉬는 것은 찰나이구나 싶었다.
지금은 살아있지만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사실을 나의 일로 받아들이게 되는 건 언제쯤일까 생각하며 나는 가만히 팔을 쓸어내렸다. 그림 속 시신도 해부용 침대에 뉘어지기 얼마 전에는 살아있는 몸이었을 테고, 다양한 표정으로 해부학 강의에 집중하는 의사들 역시 언젠가 숨을 멈추게 된다는 사실을 살아 있을 때는 알 턱이 없었을 것이다.
살아오면서 무척 괴로웠했던 일들도 지나고 나니 무슨 고민을 했었는지 흐릿해졌고, 또 기쁨으로 가득 찼던 순간들 역시 지나가 고나니 무엇 때문에 그토록 가슴이 벅찼었는지 희미해져 버렸다.
모든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시간 앞에서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만다.
<튈프 박사의 해부학 수업>을 보고 몇 걸음 옮기니 바로 옆방에는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정물화 몇 점이 걸려있었다.
아름다운 꽃과 과일, 혹은 연주를 멈춘 악기 옆에 시치미 떼듯 놓여있는 해골.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 오브제들을 한 화면에 담은 그림을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였다. '바니타스'란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구약 성경 코헬렛서의 첫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당시 바니타스화에는 집 한 채 값에 맞먹는 튤립이나 외국에서 구입된 보석이나 시계 같은 귀중품들이 자주 등장했는데 이것은 정물화의 수요층이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 부르주아들이었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다.
그들은 그림 속의 이런 사치품을 통해 자신들이 이룬 부에 자긍심을 느끼는 동시에 해골의 퀭한 동공을 보며 탐욕을 경계하기 위해 바니타스화를 집에 걸어두었다.
아무리 값비싼 보석이나 심오한 지식도, 눈과 입을 즐겁게 하는 꽃과 과일도 결국 시들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니타스화의 쓸모였고 여전히 우리가 그 앞에 머무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행 떠나기 한 달 전, 십칠 년 동안 함께 살아온 강아지 오늘이가 하늘나라로 갔다. 집 안에는 오늘이가 입던 옷가지와 물그릇, 그리고 계단 같은 것이 남아있다. 빈 그릇을 바라볼 때마다 맛있게 죽을 먹던 오늘이가 생각난다.
동물병원에서 오늘 이를 데려오던 날, 주먹만 한 강아지를 안고 깡충깡충 뛰며 좋아하던 어린 딸에게 "나중에 강아지도 다 죽어"라고 했더니 "나도 알아. 그래도 오래오래 살 수 있게 내가 잘 돌볼 거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늘이는 거짓말처럼 눈앞에서 사라졌지만, 그 작고 따스했던 동물과 함께했던 시간들은 식구들의 삶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언젠가 모든 것이 사라지겠지만 오늘 내 앞에 있는 당신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이며 이 헛됨 속에서 살아남을 영원한 힘이라고 나는 이제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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