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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 성모에서 산모까지-600년을 건너온 여성의 몸

벨기에 안트베르펜 미술관에서 모성을 되묻다

by 루씨

모성은 정말 타고나는 것일까

말복이 지나고 매미소리가 자지러지는 여름 끝물이다. 나에게 8월은 첫 출산의 기억과 함께 지나간다. 습기와 열기가 후근 하게 달아오른 늦여름, 진통이 시작된 후 스무 시간이 지나서야 강보에 싸인 아기와 만나게 되었다. 난생처음 '엄마'가 되는 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이후 내 일상은 아기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일로 채워졌지만 그 고단함은 씽긋 웃는 아기의 표정 하나로 스르르 사라지곤 했다. 하지만 내 안에는 엄마가 되기 이전의 내가 여전히 묻고 있었다. 언제까지 혼자 아기를 돌봐야 하는지, 그리고 내가 다시 사회 속으로 들어가 일할 수 일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작품은 변하지 않지만 전시는 맥락을 바꾼다

유럽 미술관을 찾아다니며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를 그린 작품들은 수없이 많이 보았지만, 안트베르펜 미술관에서 만난 성모자 회화 전시는 특별했다.


기독교 문화권에서 마리아는 성스러운 모성의 상징이다. 특히 아기예수를 인고 있는 성모상은 사랑과 희생의 아이콘으로 읽힌다. 하지만 그림이란 언제나 관객과의 만남에서 새로운 메시지가 만들어낸다.


<세라핌과 케루빔에 둘러싸인 마돈나> 1460년 93x85㎝, 안트베르펜 왕립미술관

장 푸케의 <세라핌과 케루빔에 둘러싸인 마돈나>는 여러 가지 아트상품으로 만들어져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안트베르펜 미술관의 대표작품이다. 15세기 프랑스 르네상스 회화의 문을 연 그는, 당시 왕인 샤를 7세의 정부 '아녜스 소렐'을 모델로 성모를 묘사했다. 그래서인지 푸른 드레스를 입고 한쪽 가슴을 드러낸 마리아는 성스러움보다는 당대 남성 권력이 욕망했던 여성의 관능미가 느껴진다.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를 묘사한 많은 에로틱한 회화들이 그림을 보는 관객들의 관음 욕구를 자극했듯, 장 푸케의 제단화 역시 남성의 시선으로 바라본 성스러움과 관능을 담아내고 있다.

<샘가의 마돈나> 1439 19×12cm / 얀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로 널리 알려진 '얀 반 에이크'의 <샘가의 마돈나>는 엽서 크기의 작은 그림으로 혼자 기도할 때 바라보는 용도로 제작된 패널화이다. 엄마의 목을 감고 노는 어린 예수의 모습은 장 푸케 그림 속의 성모보다 훨씬 친밀한 모자 사이임을 보여주고, 그림 전면에 있는 맑은 샘을 배치해 생명의 원천인 마리아의 사랑과 경건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역시 남성 화가의 시선에 투영된 성스러운 모성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유럽의 여성작가들은 모성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약 560년의 시간을 건너 한 자리에 나란히 전시된 '리네케 디크스트라'(1959~ )의 사진 <줄리, 사스키아, 테슬라> '말렌느 뒤마'(1953~ )의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어주어라>에 눈을 돌려보자.


<줄리, 사스키아, 테슬라> 1994/ 리네케 디크스트라 (Rineke Dijkstra)

세 여성은 출산의 피로가 가시지 않은 몸으로 아기를 꼭 안고 있다. 푸른 망토도, 성스러운 샘물도, 축복을 전하는 천사도 없다. 그러나 출산 후 아기를 안고 있는 여성의 몸만큼 이타적인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리네케 디크스트라'는 아기를 낳기 위해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고 자신을 내어준 순간을 포착했다.

출산 직후의 처진 배, 피 묻은 속옷, 젖을 물린 채 아기를 안고 있는 이 사진은, 수천 년 동안 생명을 낳고 기르도록 진화해 온 여성의 몸이 전하는 경이와 사랑을 보여준다.

나는 이 작품이야말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여성의 눈으로 바라본 ‘모성’의 현실이자, 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어주어라> 1992/ 마를렌느 뒤마 (Marlene Dumas)

말렌느 뒤마의 작품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어주어라>는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는 성경구절을 떠오르게 한다.

이미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어줘 버린 듯 벌거벗은 채 피곤한 표정으로 서있는 이 여성의 몸은, 리네케 디크스트라가 찍은 세 산모의 몸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디크스트라와 뒤마는 작품 속 어디에서도 성스러움과 거룩함을 말하고 있지 않지만, 이들이 포착한 여성의 몸은, 우리가 이미 받았고 앞으로 나누어야 할 사랑이 무엇인지 가감 없이 보여준다.

500여 년 전 성모상 옆에 이 두 작품을 나란히 놓은 큐레이터의 의도는,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허물고 우리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지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지극히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몸 안에 깃든 성스러움을 발견하는 체험과 함께 말이다.

모성은 남성에 의해 묘사된 성모나 성녀의 특성도 아니고 출산과 육아를 빌미로 여성에게만 요구할 덕목은 더더욱 아니다. 모성은 불완전하고 모순투성이인 인간이 나약한 타인을 향해 여는 따뜻한 마음이고, 생명을 낳아 기르고 보호하려는 의젓한 마음이다. 그 씨앗은 누구나 지니고 태어나지만 서로가 서로를 돌보며 함께 키워나가야한다는 사실을 나는 두아이를 낳아 키운 삼십 년의 시간 속에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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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야망을 감추지 않는 테레사

6화: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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