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뢸러 미술관에서 만난 고흐
미술관이 여행의 중심이 될 때
유럽을 여행할 때 나는 늘 각 도시의 미술관을 우선순위에 두고 일정을 짠다. 나라별·도시별 국공립 미술관은 물론, 안목 높은 수집가들이 만든 개인 미술관에서도 귀한 작품을 만난다. 작품 사이의 맥락을 읽어내는 즐거움은 덤이다.
빈센트 반 고흐 전시는 지난 10여 년간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열렸지만, 정작 중요한 작품이 빠져 있거나 디지털 아트 형식이라 늘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서 이번 네덜란드 여행에서는 ‘진짜’ 고흐를 만나고 싶어 미술관 두 곳을 리스트에 올렸다. 하지만 일정이 꼬여 반 고흐 미술관은 가지 못했고, 대신 오텔로의 크뢸러 뮐러 미술관에서 뜻밖의 수확을 거두었다.
국립공원 속 미술관
비가 올 듯 흐린 4월 말, 레이덴 중앙역에서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두 시간 만에 도착한 미술관은 1600만 평에 이르는 국립공원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실내 컬렉션도 훌륭했지만, 거대한 공원을 야외 전시장처럼 활용한 모습이 인상 깊었다.
고흐의 방에서
미슬관 1층에 따로 마련된 고흐의 방’에는 강렬한 색감의 초상화 여러 점과 〈밤의 카페테라스〉 같은 그의 대표작 수십 점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렇게 유명한 그림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가슴 설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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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들을 하나하나 다 둘러보고. 나니, 식탁에 둘러앉아 '감자를 먹는 사람들'의 표정이 왜 저리 무뚝뚝한지 이해되었다. 하루 종일 단내 나도록 일하고 난 후 집으로 돌아와 서둘러 감자를 찌고 뜨거운 차 한 잔으로 허기를 달래었을 테니 표정은 퀭했을 테고, 또 내일이면 밭에 나가 흙을 파며 함께 일해야 할 이들이니 조금이라도 더 먹으라 권하고 싶었을 것 같았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농사와는 거리가 멀지만, 고흐의 그림들을 보며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 손으로 가꾸고 일구어온 일에 대해. 또 내가 누리는 일상을 떠받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에 대해서도 떠올려보게 되었다.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가사 노동과 육아 그리고 돌봄 노동은 끊임없이 나의 정체성과 쓸모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삼십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야 내가 해온 일들이 세대를 잇고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중요한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지금 고흐의 작품들은 수천 억 원에 이를 정도로 비싸게 거래되지만, 우리가 잘 알듯이 살아있는 동안 그는 늘 생활고에 시달렸으며, 그의 재능과 열정은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가 그린 이웃들의 초상화 안에는 삶을 긍정하는 따뜻한 기운이 가득하다.
연분홍 색 벽을 배경으로 턱을 괴고 있는 <지누부인의 초상화>는 <밤의 카페테라스> 속의 카페 여주인을 모델로 한 작품이다. 그녀는 밤늦도록 압생트를 마시는 고흐의 말벗이 되어주기도 하고 어머니를 떠올리게도 했을 갓이다.
또 덥수룩한 수염을 한 <조셉 룰랭의 초상화>에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준 우체부 룰랭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느껴진다. 고흐는 물감을 살 돈조차 부족했지만 이들의 삶 속에 스며있는 사랑과 유머를 포착해 냈고, 또 거기서 자신이 살아갈 힘을 얻었을 것이다.
나는 고흐가 남긴 수많은 작품을 보며, 누군가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계속해나가는 힘의 위대함을 본다. 빈센트 반 고흐는 서른일곱 해의 짧은 삶 동안 가난과 외로움, 착란과 희망 사이를 오가면서도 자신의 일을 놓지 않았다. 그가 마땅히 누렸어야 할 노동의 열매는 모두 그를 비껴갔지만 그는 고통 속에서 피어난 희망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의 그림은 우리가 날마다 각자의 일로써 사랑을 이어가고 넓혀가는 사람이 되도록 힘껏 격려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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