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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Sep 12. 2024

64. 일기떨기: 선란의 밀린일기

내가 살고 있다는 걸 지구가 몰랐으면 좋겠다.




 나는 옷이 좋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옷의 질감, 두께, 그리고 색상. 가을이 오면 나와 톤이 맞지 않은 브라운 계열의 옷을 입는 것도 즐겁고, 가벼운 셔츠나 얇은 후드에 짧은 하의, 양말에 신발 신는 차림새도 좋다. 양말에 샌들을 신느냐, 어떤 운동화를 신느냐, 어떤 색과 길이감의 양말을 신느냐에 따라 클래식함, 스포티함 등으로 달리 느껴지는 것도 참 좋다. 오버핏의 재킷이나 트랜치 코트는 말 할 것도 없고. 겨울이 오면 부드러운 니트나 기모 후드를 입는 것도 좋다. 무엇보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내가 겨울을 버티는 유일한 이유인 목도리. 목도리에 맞춰 그날의 옷을 결정할 정도로, 나는 목도리가 좋다. 그렇게 한 겨울을 나고 나면 코 끝에 따뜻한 바람이 느껴질 즈음 카디건을 꺼내야지. 가볍고 편한 슬랙스에 목 짧은 양말을 입고. 여름은 나의 계절. 주렁주렁 악세서리와 햇볕에 피부가 타든 말든 가볍고 시원한 차림을 양껏 입는다. 확고한 스타일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무난한 옷 취향이지만 나는 취향이 뚜렷하여 유행에 잘 휩쓸리지 않는 대신 비슷한 계열의 옷을 자주 산다. 물론 내 눈에는 다 다르다. “이거 살까?”하면 친구들이 “옷장에 있지 않아?”하고 물을 정도로. 미묘하게 다른데, 그것들을 모르시네.


 식탐은 별로 없어 음식 유행에는 관심이 없다. 유행하는 디저트나 마라탕 떡볶이 이런 것도 안 먹어 봤다. 먹을까 싶다가도 ‘굳이 나까지?’라는 생각으로. 누군가는 배달을 시켜야만 하는 생활을 하고 있으니, 나라도 배달 음식을 시키지 말자, 음식을 남기지 말자, 음식에 욕심내지 말자, 라는 마인드다. 근래에는 주방세제나 바디워시도 전부 비누로 바꿨다. 세안은 오래 전에 비누로 바꿨는데 어쩐지 나머지는 쉽게 도전 못하다가 하나씩 바꿨다. 남은 건 샴푸랑 트리트먼트인데, 되도록 샴푸만 쓰고 싶다. 한 번에 바꾸면 힘드니까 순차적으로 바꾸는 중이다. 오랫동안. 그래, 이건 환경에 대한 나의 사소하고 미미한 노력이다. 그런 내가 요즘 세운 한 가지 목표는 향후 1년간 옷을 사지 않는 것이다. 


 지난 상반기에는 한국에 없어도 될 정도로 캐리어 하나를 끌고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짐이 주는 무게를 줄이고 싶어 옷을 점점 단출하게 들고 다니지, 어느 순간 10벌 안 되는 옷으로 잘 살고 있는 나를 마주하면서 생각이 많아졌더랬다. 언젠가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짐이 캐리어 하나라던 소진이 말도 떠오르고. 집에 와 옷장을 보는데, 물론 드레스룸이 있어야 할 정도로 많은 옷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충분한 옷들을 보며 ‘이것들이 다 닳을 때까지 입으려면 죽을 때까지 입어야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그런 계획을 세웠는데, 이게, 생각보다 힘들다. 누가 들으면 그깟 옷 안 사는 게 뭐가 힘드냐고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패션 잡지나 영상을 어렸을 때부터 줄곧 찾아보던, 티가 크게 나지 않는 펴선 덕후로서... 입고 싶은 아이템이 떠올랐을 때 그걸 무시하는 게 쉽지 않고, 서럽다. 솔직히 100% 지키는 것도 아닌데, 10벌을 담았다가 다 지우고, 또 지우고, 또 지우다가 아주 가끔 양말 하나를 산다. 그래, 작지만 큰 걸음이라 생각하자. 


 내가 살고 있다는 걸 지구가 몰랐으면 좋겠다. 아주 작고 하찮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아서. 물론 책 빼고. 해외에 가면 쓰레기를 남기지 않으려 노력한다. 너무 목이 말라 편의점에서 음료를 살 때는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가급적 플라스틱보다 캔이나 병으로 사려 노력하고 텀블러도 꼭꼭 들고 다니며 음식물을 남기지 않으려 노력한다. 진짜 사소하고 별 볼 일 없네, 쓰다보니. 하, 근데 가을이 오니 옷들이 또 예쁘다. 하지만 참아라. 옷보다 더 귀한 게 있다. 그게 나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이 아니겠는가. 내가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야 말로 훌륭한 외투가 아니겠는가. 내려 놓는 연습을 하는 요즘의 나다. 일기 끝.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2. 선란

『무너진 다리』 『어떤 물질의 사랑』『천 개의 파랑』『밤에 찾아오는 구원자』『나인』『노랜드』『아무튼 디지몬』을 썼습니다.

  환경파괴, 동물멸종, 바이러스를 중심으로 SF소설을 씁니다.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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