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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에게 Mar 02. 2022

7일의 제주가 내게 쥐어준 것

그래도 이곳에 와야 했던 우리


한 해가 시작되면 B와 여행을 간다. 수고한 지난 해를 송년하면서 새해에 대한 준비의 시간을 갖는다. 1월 1일이 되었다고 마음가짐이 리셋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대단히 바쁘게 살지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도 아니지만, 연초의 여행엔 힘을 기울인다. 한 살 한 살 먹으며 사는 게 막막해질수록, 이 '의식'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이번 해도, 정말 잘 살고 싶기 때문이다.



19년도에는 외진 섬을, 20년도에는 제주를, 다음 해엔 다시 외진 섬을... 그리고 올해 다시 제주를 찾았다. 백신을 접종하지 않은 나와 B는 정말 집과 마트 등을 제하고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탁 트인 곳을 가고 싶었다. 하늘과 바다, 푸른 들, 달뜬 얼굴의 관광객들이 있는 그곳으로.



20년도에 제주를 왔을 때, 애월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엄청난 쓰레기 양에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아름다운 관광지로 소비되는 제주의 실제는, 아니 제주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었다. 우리가 방문하는 건 이곳 자연의 입장에서는 쓰레기를 더 보태는 격이 아닐까 싶으면서도, 그럼에도 낮은 돌담으로 삼삼오오 모여있는 정겨운 집, 에메랄드 빛의 바다, 드넓은 하늘과 푸른 들의 제주를 포기하기 어려웠다. 이곳이, 간절했다.



B는 이제 삼십 대 중반을 넘겼고, 나는 삼십 대 초반이라 할 수 있는 나이를 지났다. 나는 8년차, B는 16년차의 가난한 예술가 커플이고, 모아놓은 돈은 역시 없다. 이렇다 할 엄청난 재능을 인정받지도 못했고, 한 분야에 뛰어들고는 있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너무 많았다. 그렇고 그런, 하지만 성실하게 살고, 포기하지 않은 꿈이 있는 사람들. 일을 맡으면 그보다 배를 하려는 성실함으로 우리는 꾸역꾸역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려 노력했다. 특히 작년이 그랬다. 코로나로 수입이 끊기는 것이 두려워 닥치는 대로 일을 잡았고 집에서 서로 이야기할 시간도 없는 생활을 했다. 그렇게 살아도, 우리는 우리의 분야에서 뒤처진 사람들이었다. 우리의 1.5룸은 점점 작품에 필요한 물건들로 가득 채워졌지만, 쌓이는 건 물건과 시간만인 건 아닐까, 불안해하고 있었다.



제주에 간다고, 다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이 불안에 편안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불안을 편안해한다는 건 모순적일 수 있지만 내가 무엇에 대해, 왜 불안한지 인정하고 마주하는 건 쉽지 않다. 불안이 어디에서 왔는지 정확히 알려면, 현실 속 나를 객관적으로, 조금은 냉철한 시선에서, 전문적인 타인의 관점에서, 성과주의 측면에서 재단하듯 조목조목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나와 B의 좁고 작은 에서는, 사실 회피가 좀 더 익숙했다. 이불 속으로, 서로의 품으로 숨어들어 불안한 생각을 잠재웠다. 문제를 유보하는 거란 걸 알면서도.



첫 3박 4일은 협재해수욕장 근처의 한림읍에서 보냈다. 우리는 늘 바다가 보이는 곳을 고른다. 값이 조금 나가도, 누릴 수 있는 옵션이나 방의 크기가 작아도, 우리는 바다에 기댈 수 있는 선택지를 마련한다. 오래된 리조트로, 오랜 세월만큼 같은 조식이 계속 나오고, 세련되기보다는 촌스러운 이미지가 강했지만. 구석구석 녹이 슬고 페인트가 벗겨지고, 방음도 제대로 되지 않지만, 침대에 누워서 바다를 볼 수 있는 이곳을. 아침마다 바다를 보러 가고, 내친 김에 식물원과 동굴도 가보며 우리는 제주의 구석구석에 머물려 했다.



그러다 나머지 3박 4일은, 원래의 우리 방식대로, '바다를 보는 것 외엔 별다른 걸 하지 않는' 여행을 추구하기로 했다. 버스로 약 2시간을 이동해 표선해수욕장 근처의 하천리 펜션에 왔다. 테라스에 선베드가 있고, 누웠을 때 발끝에 바다의 풍경이 걸리는 점이 정말 좋았다. 무엇보다 우리 집의 5배나 되는 집 크기에, 소파와 텔레비전, 전자레인지와 테라스, 편히 앉아 글을 쓸 수 있는 테이블이 있는 점이 너무나 좋았다. 아침마다 커다란 창으로, 새떼가 날아들듯 환하게 쏟아지는 햇빛도 근사했다. 우린 바다를 보고, 카페에 가고, 든든한 밥을 먹으며, 해가 지고 뜨는 것을 보는 일에 충실한 며칠을 보냈다.



그렇게 보낸 6박 7일의 시간이 분명 마음의 근육을 키운 것 같다. 여기에서 만들어진 힘이, 다시 내년이 도착하기 전까지, 내년의 여행을 오기 전까지, 미미하더라도 지지대가 되어줄 것이다. 흔들리고 쓰러지려 할 때마다 잡아줄 거라 생각한다. 제주에서 내가 얻고 가는 것은, '다 괜찮을 거야'가 아닌, '힘들 거야. 하지만 해볼만 할 거야'인 것 같다. 이곳에서 읽게 된 책 『피로사회』에서 목표를 이루는 행위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그 중 '무언가를 완결시킬 수 있는 능력'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내가 설정한 어떤 목표가, 그것이 사회구성원에게 긍정적 효과를 미치거나 시장논리에 있어 성과적인 무엇이 아니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럴싸한'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내가 선택한 삶, 가고자 하는 길, 가고자 하는 방향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곧 내 인생을 완결하는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정신적 요새로서의 제주를,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거듭 찾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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