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시들게 두지 않으려는 마음들을 본다
창가에서 혹은 동네 골목길에서,
잠깐 고개를 들거나 돌리는 것만으로
생각보다 많은 식물들을 만날 수 있다.
동네 친구, 동네 밥집이 있는 것처럼
나는 그것을 동네 식물이라 부른다.
내 방 창가에서 해가 기우는 쪽으로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옆집 옥상이 그대로 보인다. 눈높이보다 조금 낮은 정도. 5층 빌라 꼭대기 층에서 가끔 갑갑한 기분이 들다가도, 창 너머 푸른 잎들이 무성히 드리운 옥상을 바라볼 때면 바람을 쐬듯 기분이 시원해지곤 했다.
옆집 할머니는 더러 분홍색 수건을 젖은 머리에 돌돌 만 채로 나와 이름을 다 알 수 없는 나무와 꽃들에 물을 주곤 했다. 호스로 물을 주는 옆 모습이 어찌나 청량해 보이는지, 그런 아침엔 내 기분이 다 맑아졌다. 할머니의 정원을 매일 같이 훔쳐보는 게 아무래도 좀 수상해 보일 것 같아 창문을 열고 반갑게 인사해본 적은 없지만, 그 옥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어쩐지 그녀를 알고 지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간혹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창가로 데려와 내 마당이라도 되는 양 그 옥상을 보여주곤 했다. 며칠 전부터는 접시꽃이 환하게 폈지, 저건 수세미란 거야, 그런 식으로.
시골에서 자란 내게 도시 생활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삭막해서, 두어 달에 한번쯤 바다나 산이나 들판을 보고 와야 숨이 좀 편히 쉬어지는 기분이다. 그래서 그마저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땐, 마음에 물을 주듯 꽃이나 나무나 화분을 바라보는 일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골목을 산책할 때면 식물을 찾는 일이 습관이 됐다. 그러자 깨진 보도블록 틈에도 싹을 틔우듯, 이 도시 곳곳에 얼마나 많은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엇비슷한 다세대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선 골목에선 집집마다 창가에 내놓은 화분들이 어떻게 다른지 살피기도 하고, 옥상 바깥으로 삐죽 가지를 내놓은 나무가 무엇인지 궁금해 고개를 치켜들고 눈을 가늘게 뜨기도 한다. 담장 너머로 뻗어 나온 감나무나 대추나무를 볼 때면 이 집 마당에서 언제부터 자라 이렇게 큰 것일까 궁금해지고, 유난히 화분이 많은 집을 지나칠 때면 혼자서 괜히 반가워지기도 한다. 대문 안쪽에 사는 낯모르는 이를 알지도 못하면서, 마음이 열리는 기분이다.
개와 함께 산책하는 이들이 어렵지 않게 서로 말을 트듯, 저 나무와 꽃들의 이름을 묻는 것만으로 잠시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대문 앞에 내놓은 화분을 바라보고 있으면, 집 주인들이 경계심 없이 다가와 말을 걸기도 했다. 묻지 않은 꽃의 이름을 먼저 알려주기도 하고, 분갈이하다 떼어낸 작은 뿌리를 나눠주기도 한다. 엊그제 마주친 할아버지도 그랬다. 슈퍼에 갔다가 평소 잘 다니지 않던 골목으로 들어섰는데, 막다른 골목 안쪽에 화분이 가득 모여 있는 게 보였다. 호기심에 가까이 걸음을 옮겼다. 빌라와 빌라 사이 빈 공간이 온통 화분이었다. 아침나절 누군가 물을 뿌린 듯 싱그러워 보이는 잎사귀들 옆으로 조그만 차 테이블과 의자도 놓여 있었다. 이 자리에서 티타임을 즐기는 이가 누구일지 저절로 궁금해지는 풍경이었다. 한참을 구경하고 섰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할아버지 한 분이 다가오셨다.
“어디서 오셨는가?”
“아… 지나다가 화분이 예뻐서요.”
몰래 훔쳐보다 들킨 사람처럼 서둘러 대답하자, 할아버지는 이내 경계를 풀고 손짓을 하셨다. “사진을 찍을라믄 이걸 찍어야제.” 벽돌색 건물을 타고 오르는 덩굴을 기특하다는 눈빛을 담고서 가리키신다. “요놈들이 아직은 퍼렇지만, 좀 있으면 열매가 빨갛게 익어서 장관이여. 그때 와서 더 많이 찍어 가.” 그렇잖아도 궁금했던 터라 덩굴나무의 이름을 묻자, “이름은 모르지만 기가 막힌 놈이다” 하고 당당하게 소개하신다. 언제부터 이곳에다 화분을 키우기 시작하신 걸까, 호스로 물을 듬뿍 뿌려주고 저 조그만 테이블에 앉아 있을 때의 기분이란 어떤 것일까, 궁금한 것은 많지만 더 묻지 않는다. 할아버지 말대로 다음에 다시 보러 오고 싶어 나는 몇 번째 골목의 어떤 집인지 몇 번씩 돌아보며 기억해둔다.
그러다 보니 아래층에 누가 사는지는 몰라도, 아래층 창가에 어떤 식물이 사는지는 알게 되었다. 그건 사실 이웃을 알고 지내는 것과 다르지 않은 기분이다. 누군가 물을 주고 볕을 쪼이며 보살피는 화분이 있는 곳엔, 사람이 부재할 때도 늘 어떤 인기척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창가의 식물들은 그런 식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이것을 돌보는 이를. 자신만의 규칙으로 움직이고 있을 어떤 손길을.
우리 동네엔 그밖에도 매일 마주치는 더 많은 동네 식물들이 있다. 바로 앞집 빌라엔 봄부터 가을까지, 그러니까 한겨울을 제외하곤 늘 키 큰 화분들이 현관까지 쭉 열을 맞춰 서 있어 눈길을 끈다(도대체 이 키 큰 나무들이 실내 어디에서 무사히 겨울을 나고 이토록 싱싱하게 봄을 맞는 건지 궁금할 때가 많다). 저 빌라 사람들은 매일 식물의 터널을 통과해 집으로 들어가는 기분이겠구나, 싶어 부러워질 때도 많다. 계절에 따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그 화분들 덕분에 삭막한 골목 안쪽에 생기가 더해졌다.
점심 무렵이면 손님으로 꽉 차는 백반집 화단에는 쌈 채소로 쓰이는 상추나 치커리, 풋고추 같은 것들이 무럭무럭 자란다. 동네에 이렇게 자급자족되는 채소들이 많다는 것도 산책을 하면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그렇게 다니다 보면 인적 없는 곳에서 저희들끼리 무성하게 자라난 식물들도 발견하게 된다. 빈집의 대문 너머나 빌라 뒤켠의 버려진 화단 같은 곳에서. 사실 내겐 그 무질서한 풍경이 더 반갑기도 했다. 지천에서 꽃과 풀이 마구 자라던 어린 시절의 들판을 떠올라서일지도.
우리가 보는 지도엔 근린공원이나 숲처럼 비교적 넓은 녹지대만 표시되지만, 좀 더 확대해서 들여다보면 동네마다 무수한 초록 점들이 별처럼 박혀 있는 셈이다. 누군가는 그걸 바라보는 게 무슨 의미이고 재미냐 물을지 모르겠다. 하기야 내가 바라보거나 말거나, 이름이나 안부를 궁금해 하거나 말거나 식물들은 저대로 잘 자라며 자신의 시간을 산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동네 식물들의 존재를 하나둘 알게 되고 나서, 내게는 이곳이 좀 더 살 만한 도시가 되었다.
동네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스페인 코르도바의 ‘꽃의 거리(Calleja de Las flores)’가 떠오른다. 코르도바에서는 봄이면 새하얀 건물의 외벽과 광장, 집집의 창가마다 화분이 내걸린다. 사람 두 명이 겨우 지나갈 만큼 좁은 골목길 양쪽 벽면에 화분이 무수히 내걸려 있는 풍경은이라니.
여행자들은 이 도시에 들른 것이 행운이라는 들뜬 눈빛으로 골목 이편과 저편을 오갔고, 산책 나온 연인들은 허리를 꼭 끌어안고 서 있곤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길이었다. 크고 작은 화분이 뭉게구름처럼 머리 위에 떠 있는 이런 거리에 온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들떠 걷지 않을까.
코르도바에서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색적인 풍경은 파티오(patio)였다. 스페인이나 남미의 건축 양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파티오는 하늘이 트여 있는 건물 내의 안뜰이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한여름이면 40도까지 달아오르는 기후 탓에 파티오는 중세 스페인 사람들의 휴식처로 중요하게 여겨졌다고 한다. 뜨거운 여름이 오면 가장 자주 또 오래 머무는 곳이니, 야외에 거실을 하나 더 두는 기분으로 파티오를 꾸민 것이리라.
그 같은 배경을 미처 모르고서 도착한 여행자의 눈에, 집 안팎을 공들여 가꾸는 코르도바 사람들의 손길은 그저 감탄스러웠다. 그들은 마치 꽃에게 그러하듯 매일의 일상을 정성껏 돌볼 것 같았다.
오늘 하루를 시들게 두지 않으려는 사람들.
물을 주고 마른 잎을 떼어내며 오늘을 돌보는 사람들.
집 안에 하늘을 들이고 꽃밭을 가꾸는 저런 마음이라면, 내가 모르는 삶에 대한 어떤 대답을 알고 있을 것도 같았다. 그 답을 들으려, 그 시절 나는 발 아프도록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안다. 사실은 ‘꽃의 거리’까지 가지 않아도 있다는 걸. 매일 물을 주고 잡초를 뽑으며 일상을 가꾸는 사람들이. 옛날 주택 대문 위의 좁다란 화단에 삐죽삐죽 자라는 대파를 심어둔 아주머니, 스티로폼 박스에서 키워낸 방울토마토 세 그루가 자랑인 아저씨, 고무 대야 속에 흙을 퍼 담고 알뿌리 토실한 난을 심어둔 할머니들……. 꽃이든 대파이든, 저토록 싱싱하게 키워내는 이들이 이제 내겐 진짜 생활의 달인 같다.
자신의 인생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오늘을 돌볼 것이다.
하루가 모여 결국 평생이 되므로.
화초를 키워보면 안다. 화분에 꼬박꼬박 물을 주면서도, 막상 그 식물이 잘 크고 있는지 아닌지 관심 없기란 얼마나 쉬운지. 뜨거운 햇볕에 이파리가 검게 타들어가는데도, 과습으로 줄기 아랫부분이 무르고 있는데도 때에 맞춰 물만 주는 것을 ‘화분을 돌본다’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럴 때 식물은 쉬이 죽고, 그제야 우리는 내가 시들게 한 게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러니 식물을 가꾸는 게 일상을 가꾸는 것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밥 먹고 일하고 자는 생활을 영위한다 해서 잘 살고 있다 말할 수는 없다. 그건 때로 내 상태가 어떤지 살피지도 않으면서 꾸역꾸역 물을 주는 것과 다름없을 때가 있으므로.
서른을 지나면서는 나는 진짜 ‘잘’ 사는 것에 관심 있어졌다. 내게 있어서는 그것이 무엇을 뜻할까, 자주 생각한다. 그래서 틈틈이 내 마음의 안색을 살피고, 화초를 돌보듯 일상을 들여다본다. 시든 데 없나 먼지 쌓인 생활 구석구석을 닦아내고, 밖에서 사 먹는 대신 시골집에서 부쳐준 재료들로 직접 지은 밥을 먹고, 계절에 한 번씩은 답답해하는 나를 데리고서 마음을 환기할 수 있는 곳에 간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베란다에서 나의 부재를 기다려준 화초들을 돌본다. 나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관심을 두게 되면, 고단한 삶에도 살아 있는 뭔가를 보살피며 살아갈 여유를 가지면, 일상은 쉬이 시들지 않는다. 그것을 식물들에게서 배웠다.
잘 지내냐고, 괜찮으냐고,
오늘도 생활의 안부를 묻는 것은
곁에 있는 말 없는 화분들이다.
*** 좋아해서 자주 찍었고 오래 머물렀던 25개의 순간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는, 에세이집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게 취미』(2018, 위즈덤하우스) 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