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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신지 Dec 01. 2018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단 하루

삶에는 아직 우리가 발견할 순간들이 많다

     

회사 건물에는 12층까지 사무실이 있고, 한 층 더 올라가면 옥상이 있다. 옥상이 열려 있어요? 처음 출근한 날 궁금증에 물어봤다가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 올라가봤다.


아…….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차들이 오가는 사거리 너머 창경궁의 전경과 그 뒤로 창덕궁 후원을 이루고 있는 무성한 나무들, 저 멀리 북한산의 구불구불한 능선이 한눈에 펼쳐졌다. 창경궁을 안 가본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높은 데서 내려다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 뒤로 친구들이 옮긴 회사는 괜찮아? 물으면 답하곤 했다. 우리 회사 최고의 복지는 궁 뷰야. 일하다가 고개를 돌리면 궁이 있어. 그건 농담이 아니었다. 옥상에서 바라본 그 풍경은 이직한 후 내가 가장 먼저 좋아하게 된 것이기도 했다. 종종올라와야지. 도심에선 쉬이 보기 힘든, 눈 닿는 가장 먼 데까지 트여 있는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다짐이 늘 그렇듯 막상 실천하긴 어려웠다. 첫날 이후로 좀처럼 옥상에 올라갈 짬이 나지 않았다. 입사한 지 두 달쯤 지났을 때였을까.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눈이 내리자 일순간 사무실의 공기가 달라졌다. 가만 일하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창가로 모여들었다. 여태까지 내가 등지고 앉아 있던 것이 그저 스산한 겨울의 풍경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눈이 내리자 창경궁은 완전히 다른 풍경을 보여주었다. 빈 나뭇가지마다, 지붕마다 눈이 소복이 쌓여 꼭 겨울에 그린 산수화 같았다.     


옥상에 올라가야겠다.     


첫날 이후 두 달이 지나서야 그런 생각을 했다. 옥상 문을 열고 퍼붓는 눈 속으로 걸음을 옮기자, 창가에 서서 보던 것과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슬리퍼를 신은 발이 꽁꽁 시려오는 것도 잊고서 지금이 아니면 놓칠세라 눈 내리는 궁의 풍경을 찍는 동안 생각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의 풍경을, 신록이 우거진 여름의 풍경을, 단풍이 물든 가을의 풍경을 모두 찍어 간직해두고 싶다고. 그렇게 창경궁의 사계절을 모아보면 정말 근사하겠다고. 궁을 바로 곁에 두고서, 심지어 등만 돌리면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그런 걸 찍어두지 않는 건 뭔가 인생을 낭비하는 일 같았다. 


그래서 겨울이 지나고 차례로 봄과 여름과 가을이 왔을 때, 실제로 한 계절이 가장 무르익었 다고 생각되는 날 나는 옥상에 올라가 사진을 찍었다……고 하면 의지력이 대단한 사람이겠지. 물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시간이란 대체 왜 그 모양인 걸까? 짧은 봄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막상 여름이 시작될 무렵 반팔을 꺼내 입고 나서야 맞다, 봄 사진! 하고 외쳤고, 여름 사진은 놓치지 말아야지, 되뇐 것이 무색하게 가을이 오고 단풍이 시작될 무렵에야 앗, 여름 사진! 하고 깨달았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버렸다.


결국 계절이 한 바퀴 돌아 또다시 겨울이 오고 말았다. 벚꽃도, 신록도, 단풍도 없이 빈 가지만 남은 스산한 궁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1년에 딱 3장의 사진이면 되는 거였는데……. 봄에 한 번, 여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딱 하루만, 1~2분만 시간을 내면 되는 일이 왜 그토록 힘들었을까.


1년이 사계절로 이루어진 것은 어쩌면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일까. 너무 쉽게 지나가는 시간들. 다음에, 나중에, 하는 사이 바뀌어 있는 계절들. 그러니까 봄은 봄인 줄 알고, 여름은 여름인 줄 알고, 좋은 시간을 보내두라고. 왜냐하면 그 계절은, 지금도 쉼 없이 가고 있기 때문에.     


그리하여 이어지는 사진들은 결국 2년에 걸쳐 찍은 궁의 사계절이다.     


빈 가지에 새잎이 돋고 드문드문 벚꽃이 피어나던 봄의 풍경


구름이 짙푸른 숲 위로 더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던 여름의 풍경


점심시간엔 산책을 가야겠다, 자주 생각하게 만들던 가을의 풍경


처음 이 모든 사진을 찍게 만들었던, 눈 내린 겨울의 풍경



한 계절의 가장 근사한 순간을 찍고 싶다 해서, 그 순간이 거기 멈춰 나를 기다려주진 않았다. 그걸 알아채고 만나러 가야하는 건 나였다. 멈추지도, 기다려주지도 않는 시간 앞에서 그렇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은 하나였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일. 좋아하는 궁의 모습을 찍어두고, 좋아하는 골목길을 자주 걷고, 좋아하는 한강에 가서 좋아하는 맥주를 마시며 좋아하는 노을을 보고 싶었다. 모아둘 수 있도록 그 순간의 성실한 기록자가 되고 싶었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순간들이 매일 사라지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시작한 수집은 별것 아닌 듯해도 조금씩 일상을 바꾸었다. 아무렇게나 오가던 일상에, 남들은 모르는 무용한 기쁨을 모으는 주머니가 하나 생긴 기분. 기억하고 싶은 것은 주워 담고, 어떤 것은 그냥 둔다. 그런 식으로 일상이 쌓이는 게 좋았다. 하나의 계절을, 내가 사는 이곳을 비로소 ‘겪고’ 있다는 기분도 들었다. 


순간을 모아두려는 것은 인생의 사소한 구석까지 들여다보려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내가 이런 순간에 머무르려는 사람이구나, 이렇게 보내는 시간을 좋아하는구나. 알고 나면, 앞으로 나를 좀 더 자주 그런 순간으로 데려가고 싶어지기도 했다.    


나의 매일에 숨어 있는 작은 기쁨들이 있다는 것. 

삶에는 아직 우리가 발견할 구석이 많다는 것.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꼭 한참 앓고 난 뒤처럼 좀 더 잘 살고 싶어졌다.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긴 인생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그것이 ‘순간 수집’이라 홀로 이름 붙였던 취미의 시작.

더 나은 답을 찾기 전까진 이 수집을 멈추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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