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신지 Dec 29. 2018

잊지 못할 겨울을 보내는 방법

무조건 시간을 내어 좋아하는 사람과 눈 내린 풍경을 보러 가세요


겨울의 술집만큼 속마음을 털어놓게 하는 곳도 없다.     


“그런데, 그렇다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겠어. 그저 노는 것밖에.”     


술자리가 길어지고 있었다. 이 시간이면 으레 쏟아져 나오는 답 없는 고민들로 테이블 한가운데 호수가 만들어질 즈음, 그녀가 그 속에 툭 돌멩이를 던져 넣듯 말했다. 과연 요즘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놀고 있는 이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이었다. 우린 말없이 앉아 그녀의 말이 만들어낸동심원을 바라보았다. 아마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리라. 


지금의 선택이, 매일 쌓이는 오늘이, 도무지 어떤 내일이 될지 알 수 없을 때(사실 그걸 알았던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어쩌면 노는 일뿐이다. 후회란 건 어차피 그림자처럼 내내 우리를따라다닐 텐데, 무엇을 후회하게 될지 알 수 없으니 일단 노는 거라도 후회하지 않게 열심히 해야지, 뭐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을 것이다.


어렸을 때 엄마는 뷔페에 데려가면 김밥부터 떠오는 내 등짝을 맵게 때리곤 했는데, 맛있는 것부터 먹어야 내내 맛있는 것만 먹으며 살 수 있다는 삶의 지혜를 가르쳐주기 위해서였다(나는 김밥이 참말 맛있어서 먹은 거였지만). 


노는 일도 이를테면 그런 게 아닐까. 삶이 뷔페처럼 다양한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제일 재미난 노는 일부터 열심히 접시에 떠와야 한다. 그래야 내내 맛있게 재밌다가 배부를 수 있다. 삶이 한 평생이니 길 것 같지만 놀 시간은 늘 부족하다. 그건 한 해가 갈 때마다 안타깝게 깨닫는 사실.


공교롭게도 사흘 뒤에 만난 동생 역시 요즘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놀고 있었다. 주말에 어디 안 나가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둥둥 몸을 울리는 스피커 소리가 이명처럼 들려온다는, 이쯤 되면 노는 일로 금단증상을 겪고 있다고 봐야 할 그녀는, 이런 재미를 이제야 알게 된 게 억울하단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부터 11, 12월을 진짜 재밌게 보낼 거야. 친구랑 얘기를 하다가 그랬거든. ‘우리, 나중에 여든이 되어서도 기억할 만한 두 달을 보내자. 나중에 할머니가 되어서 둘이 따땃한 햇볕 아래 앉아 있다가 문득 떠올리는 거야. 그때…… 스물일곱의 11, 12월은 참 대단했었지. 우리 그때 참 즐거웠어. 그런 시간 말이야.’ 그랬더니 친구가 말이 없는 거야. 너무 한심해서 그러나 싶었는데, 걔가 갑자기 내 손을 잡으면서 이러는 거야. 야, 나 지금 감동했어…….”


우리는 깔깔 웃으며 맥주를 마셨다. 그런데 실은 나도 좀 감동해버려서, 그런 11월, 12월은 어떤 것일까 생각했다.


“언니, 실은 울 엄마가 그래. 옛날이야기를 할 때마다 늘 스물넷에서 스물다섯까지 보낸 1년을 얘기하는 거야. 그때가 아마 엄마 기억엔 제일 빛나는 시기인가봐. 들어보면 특별할 것 없는 시간인 것 같은데도 그래. 근데 또 그 별것 아닌 얘기를 듣다 보면 알겠어. 엄마가 그때 참 예뻤을 거라는 걸. 동대문에 원단 떼다 팔던 아저씨가 엄마를 그렇게 쫓아다녔다는데. 그 아저씨랑 엄마가 잘 되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 나이를 먹고 난 뒤에도 그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를 만나, 혹은 들은 얘기를 또 듣느라 지겨워하는 자식을 앞에 두고 또다시 반복할 이야기. 그런 것을 만들고 싶어서 우리는 여전히 먹고 마시고 울고 웃으며 밤새 낯선 곳을 헤매는지도 모르겠다.     



네 번째로 좋은 계절에 좋은 것들을     


굳이 따지자면 나는 사계절 중에 겨울을 네 번째로 좋아한다. 일단은 추위를 많이 타기 때문이고, 추위 때문에 몸이 움츠러들어 자연스레 행동반경이 줄어드는 게 별로여서다. 가려던 곳도 안 가고 싶어지고, 외투를 꺼내 입었다가도 다시 벗게 된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이나 깊은 침묵에 빠진 식물들처럼, 웅크린 채 한 계절을 나다 보면 기분도 자연스레 가라앉는다. 그렇지만 겨울엔 겨울만의 정서가 있다. 바로 그런 계절이기 때문에, 춥기 때문에 얻는 심상들.     

종종걸음으로 문을 열고 실내에 들어서면, 안경에 김이 서리는 계절. 매번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안경, 하고 손으로 가리키며 웃을 때의 짧은 즐거움. 오래된 지붕들을 가진 동네에 함박눈이 내리는 따스한 정경, 처마 끝에 눈 녹은 물이 매달려 만들어진 고드름, 그런 동네에 사는 친구 집을 찾아가 이불을 나누어 덮고 차가운 맥주를 마시는 밤. 추우니까 오늘은 그냥 자고 갈까 싶을 때면 멀리 여행 온 듯한 기분이 드는 것. 


그럼에도 배웅하는 친구에게 추우니까 얼른 들어가, 말하고선 골목길을 내려오는 것. 현관문을 열고 꺼져 있던 집 안의 불들을 모두 켜고, 보일러를 높이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다 보면 비로소 집에 돌아온 기분이 드는 그런 것……. 그 모든 것들이 이 계절을 네 번째로 좋아하며 나게 해준다. 돌아보면 춥고 쓸쓸했던 일 못지않게, 즐거운 일도 많았다.     


네 번째로 좋아하는 계절이라고 해서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려 하면 겨울은 더욱 길게만 느껴질 것이다. 그건 어떤 계절이어도 마찬가지다. 봄의 소란스런 꽃놀이를, 여름의 불볕더위를, 가을의 쓸쓸함을 피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그 한때가 기나긴 계절이 되겠지. 하지만 이왕이면 어느 계절을 지나든 보물찾기 하듯 그 속에 숨겨진 기쁨을 찾아내는 사람이고 싶다. 누가 겨울 속에 이런 걸 숨겨놓았네! 두어 번 접힌 하얀 쪽지를 발견하고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 그것이 네 번째로 좋아하는 계절을 나는 나만의 방법이다.     


무엇보다, 사계절 중 겨울을 제일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보다야 네 번째로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낫다. 우리는 사실 어떤 계절도 진심으로 싫어하진 않으니까. 그건 역시나, 돌아보면 좋은 일들도 많았기 때문에.         




어쩌면 당신에게, 이번 겨울이     


겨울의 끝에서 드는 생각. 요즘은 왜 이렇게 많은 것을 기억하고 싶어지는 걸까. 어쩌면 기억하는 것으로밖에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어떤 순간은 기억이 되어서야 깨닫게 된다.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순간이었는지, 다시 오지 못할 얼마나 소중한 순간이었는지. 그러니 현재를 지날 때는 무언가를 알려하기보다 그저 매 순간을 느끼는 일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 시간이 지난 뒤에, 기억이 된 그 순간이 좀 더 선명할 수 있도록.


이를테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웃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참 많이 웃었던 날들. 그때의 농담들은 사라졌지만, 종종 밤의 한강 다리 위를 스쿠터를 타고 달리면서 느꼈던 바람의 감촉만은 선명하다. 길을 걷다가 멈춰 서서 바라보았던 숱한 노을,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본 도시의 야경, 좋다는 말을 아낀 채로 나란히앉아 말없이 바라보았던 풍경. 그게 왜 잊지 못할 순간이 되었는지, 멀어진 지금에야 알 것 같다.     


30초 안에 소설을 잘 쓰는 법을 가르쳐드리죠. 봄에 대해서 쓰고 싶다면, 이번 봄에 무엇을 느꼈는지 쓰지 말고, 어떤 것을 보고 듣고 맛보고 느꼈는지를 쓰세요.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쓰지 마시고, 사랑했을 때 연인과 함께 걸었던 길, 먹었던 음식, 봤던 영화에 대해서 아주 세세하게 쓰세요. 다시 한 번 더 걷고, 먹고, 보는 것처럼. 우리의 감정은 언어로는 직접 전달되지 않는다는 걸 기억하세요. 우리가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건 오직 형식적인 것들뿐이에요. 이 사실이 이해된다면, 앞으로 봄이 되면 무조건 시간을 내어 좋아하는 사람과 특정한 꽃을 보러 다니시고, 잊지 못할 음식을 드시고, 그날의 기온과 눈에 띈 일들을 일기장에 적어놓으세요. 우리 인생은 그런 것들로 형성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설도 마찬가지예요. 이상 강의 끝. 
― 김연수, 『우리가 보낸 순간(소설)』 중에서, 마음산책, 2016     


나는 이 이야기를 무척 좋아해서 노트에 몇 번씩 옮겨 적곤 했다. 쓰는 일이 아니어도, 내겐 이것이 한 계절을 건너는 방법에 대한 은유로 들린다. 어떻게 하면 선명한 기억을 갖는가에 대한 대답도 된다. 다시 처음의 얘기로 돌아가자면, 여든이 되어서도 기억할 만한 겨울을 보낸다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겨울엔 무조건 시간을 내어 좋아하는 사람과 눈 내린 풍경을 보러 다니고, 잊지 못할 음식을 먹고, 그날의 기온과 눈에띈 일들을 일기장에 적어야지. 우리 인생은 그런 것들로 형성돼 있으니까. 


그럼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어쩌면 이 겨울이, 여든이 되어서도 기억날 만한 단 한 번의 겨울이 될지도 모르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