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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신지 Jan 12. 2019

한때는 모두 아이였던 우리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볼 때면, 우리가 잃어버리고만 어떤 마음을 생각한다

바닥에 부딪쳐 튀어 오르는 빗방울처럼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카메라를 들게 된다. 햇볕에 빛나는 동그란 뺨을, 지칠 줄 모르는 생기를 찍어둔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들춰보면 사진 속엔 늘 그보다 큰 것이 담겨 있었다. 이를테면 우리가 잊어버린 어떤 시간, 한때 가졌으나 잃어버리고 만 어떤 마음들이.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이들이 천진하게 놀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그렇다. 모래 놀이나 물장난 같은 것으로 하루를 보낼 수도 있는 저 순전한 몰입과 기쁨, 호기심에 가득 차 쉼 없이 세상을 뛰어다니는 일.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던 우리가 어느 순간 더 이상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면, 그 사이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런 의문 때문에 나는 아이들 앞에 자주 멈춰 서서 이런 사진들을 찍었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읽은 소설 속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리버는 브루클린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소년이다. 어느 날 우연히 리버가 피아노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게 발견되자, 엄마 미란다는 그를 아렐 교수에게 데려간다. 아렐은 엄청난 연습량과 정교한 연주로 명성이 높은 노교수다. 판박이식 교수법이 주류이던 때, 아렐은 불완전하고 자유로운 리버의 연주를 묵묵히 지켜보는 쪽을 택한다. 


리버의 재능이 사라질까 봐 두렵다는 미란다에게 그는 말한다. 재능을 지켜주는 건 아주 간단하다고. 리버에게 공감해주라고, 그게 무엇이든. 미란다는 당신에게도 그런 엄마가 있었느냐 묻는다. 아렐은 세상 모든 어머니가 그렇듯 걱정이 많은 분이셨다고 답한다.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는 이렇다.     


“어떤 말이 듣고 싶으세요. 만약 살아 계시다면.” 

“아마 이런 말일 것 같아요.” 

아렐이 잠깐 숨을 골랐다. 

“피아노를 치기 싫으면 치지 않아도 돼.”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나요?” 

“엄한 분이셨어요.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당신은 피아노를 좋아한 거 아니었나요?” 

“물론, 나는 피아노를 좋아해요. 하지만 이건 피아노랑은 상관 없어요. 이건 존중에 관한 문제예요. 내 주위에는 온통 피아노를 더 열심히 쳐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뿐이었어요. 그래서 이런 식으로밖에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된 거죠.” 

“리버가 정말 피아노를 치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죠?” 

“그럼, 치지 않으면 되죠.”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말 그대로예요. 덧붙일 말은 없어요.”

―김태우, 「피아노」, 2014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실제로 두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가 쓴 이 소설은 ‘훼손’에 대해 말한다. ‘한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 결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교육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훼손뿐’이라고. 이 세상에 재능이 없는 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다만 재능을 잃어버린 아이가 있을 뿐. 작가가 아렐의 입을 빌려 말하는 이 단언 앞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늘 농사일로 바빴던 부모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아이인지 잠자코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다. 그것을 들여다봐준 사람은 1년에 두세 번 시골집에 들르던 서울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의 형제는 여섯이었는데, 시골에 살던 나는 그들 모두를 서울 할아버지라 불렀다. 그렇지만 내가 ‘서울 할아버지’라 말할 때 실제로 떠올리는 것은 한 분뿐이었다. 


할아버지는 늘 나를 얼마쯤 기특해했다. 시골집에 내려와 잠시 어딘가에 일을 보러 갈 때도 나를 꼭 데리고 다니셨을 만큼. 함께 외출한 날이면, 집에 돌아와 식구들이 다 같이 둘러앉은 저녁 자리에서 오늘 하루 내가 한 말들을 자랑하시곤 했다.   

  

“오늘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멀리 시내 불빛들을 보면서 어린 별들이 세상이 궁금해 내려온 거라고 하더라. 돌아가고 싶은데 하늘에 있는 엄마별을 부를 수가 없어서 저렇게 반짝이는 거라고. 조그만 게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하는지.”     


지금 돌아보면, 그냥 어린아이가 어려서 할 수 있는, 쉽게 의인화하는 말들일 뿐이었는데도 그랬다(이 레퍼토리는 내가 다 자라기까지 족히 백 번은 반복하셨던 것 같다). 할아버지가 늘 놀라고 기뻐하고 기특했으므로, 나는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언어로 표현하는 것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그것이 내 속의 무언가를 자라게 했을 거라고 깨달은 건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다. 내 안에 나도 알지 못하는 아주 조그만 무언가가 움텄을 때, 그것을 알아보고, 물을 주고, 햇볕을 쬐게 한 사람이 있었다.


스물셋이 된 내가 국경을 넘어 1년 동안 여행을 떠나겠다고 했을 때, 할아버지는 엄마 편에 손수 쓴 편지를 남겨두었다. 그 안엔 붓펜으로 쓴 점잖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더 넓은 세상으로 가는 사랑하는 손녀에게! 앞날에 무궁한 발전을 바라는 마음에서 돌아가신 큰할아버지를 대신해 이 할아버지가 작은 정을 담아 보낸다. 잘해낼 수 있을 거야. 믿는다. 힘내라!     


봉투 안에는 은행에서 갓 환전해온 듯한 빳빳한 백 달러짜리 지폐들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 편지를 세 번, 네 번 접어 배낭의 가장 깊숙한 곳에 넣었다. 아무리 험한 곳을 가더라도 이 마음이 나를 지켜주리라 생각하면서.


지금 내가 어떤 식으로든 글 쓰는 일을 하게 되었고, 여전히 쓰는 일에 기쁨과 슬픔을 느낀다고 하면, 할아버지는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가족들에게 어린 별 얘기를 전할 때처럼 흐뭇한 얼굴을 하실까. 할아버지는 내가 여행에서 돌아온 이듬해 겨울에 돌아가셨다.          



지는 햇빛 속에 집으로 돌아가던 날들


아이들이 해변에서 모래 장난을 하며 노는 모습을 보며 앉아 있던 건, 서해의 작은 섬에서였다. 전철과 버스와 배를 번갈아 타면서 세 시간 넘게 걸려 도착한 길이었다. 기껏 찾은 숙소는 지저분했고, 변변한 식당도 없는 비수기의 섬에서 저녁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금방이라도 비를 쏟을 듯한 하늘은 섬의 풍경을 더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자연스레 마음도 가라앉았다. 


내가 뭐 하러 여기까지 온 걸까. 


스스로를 탓하는 심정으로 해변에 앉아 있었다. 탁한 회색빛 섬에 유일하게 색깔을 입히고 있는 건, 해변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였다. 높은 파도 탓에 해수욕이 여의치 않아지면서 실망한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굳이 바다가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듯 파도가 만들어낸 모래 위의 조그만 물웅덩이에도 반갑게 뛰어들었다. 


거기에서 찰박찰박 발로 물을 차다가 털썩 등을 대고 누워버리기도 했다. 옷이 쫄딱 젖고 만 여동생을 말릴 줄 알았던 예닐곱 살 오빠는 깔깔 웃으며 저도 그 옆에 누워 양팔을 휘저었다. 놀란 쪽은 오히려 나였다. 엄마한테 혼날 텐데 싶어 괜스레 마음이 쓰이는데, 아이들 표정을 보니 그런 걱정은 오히려 머쓱해졌다. 바다에 왔는데 옷 하나 젖는 게 뭐가 대수라고.     

이튿날 항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파도가 높아 배가 늦어질 거라는 방송이 연신 낡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선착장에 몰려든 사람들 사이엔 묘한 짜증 초조함이 감돌고 있었다. 배를 기다리는 목적밖에 없는 어른들은 붕 뜬 시간을 어쩌지 못한 채로 여기저기 앉거나 서 있었다. 아이들은 달랐다. 배의 연착은 아이들에게 그저 매미를 구경할 시간이 더 늘어난 것뿐이었다. 나무 위를 향해 고개를 한껏 치켜들고, 납작 엎드린 매미 등을 발견할 때마다 숨은 그림을 찾아낸 듯 깡충깡충 뛰었다. 


놀랍게도 아이들은 금방금방 눈앞의 풍경에 집중하며 즐거움을 찾아냈다. 그러니까 실은, 섬을 찾은 여행객들 중에서 짧은 주말을, 그리고 이 작은 섬을 가장 잘 즐기고 있는 건 아이들뿐이었다.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제 오늘, 사소한 실망과 걱정으로 자주 어두워지던 내 마음이 떠올랐다. 기껏 여기까지 왔으면서 나는 어떻게든 이 섬에서 실망할 거리만을 찾아내려는 사람 같았다. 같은 배를 탄 소란스런 단체 여행객, 사진과 달리 낡은 숙소, 식당 벽의 때가 잔뜩 낀 선풍기 같은 것들이 내 휴가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얼마나 바보 같은지.


그러고 보면 아이들에게서 배우고 싶어지는 것은 모두 내가 잃어버린 것들이었다. 한때는 당신도 나도 가지고 있던 것들, 그러나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것들, 그러니 마음속을 더듬어 다시 찾아내면 되는 것들. 


『넉 점 반』이라는 그림책에서는 반듯한 단발머리를 한 꼬마가 가겟집에 들어서며 할아버지에게 시간을 묻는다(옛날엔 이렇게 시계 있는 집에 가서 시간을 묻기도 했다).


“영감님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 시냐구요.”

“넉 점 반(네 시 반)이다.”


아이는 넉 점 반, 넉 점 반, 되뇌며 문을 나선다. 집에 가려는데 문 앞에서 세숫대야 위에 올라앉아 있는 수탉을 마주친다. 물 먹는 닭을 가만 구경하다 보니, 그 옆으로 개미 떼가 지나가고, 쪼그려 앉아 한참 개미를 보다 보니, 고추잠자리 무리가 머리 위를 날고, 잠자리 따라 동네 길을 한참 걷다 보니, 분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고, 그 속에 파묻혀 꽃을 따며 놀다 보니 하루해가 꼴딱 지고 만다.


아이는 어스름 속에 집에 돌아와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 한다. 동생 젖을 먹이고 있던 엄마는 진작 포기했다는 표정이다. 재밌는 것은, 대문에 들어서는 아이의 등 뒤로 가게 앞에 나와 부채질하던 할아버지가 ‘저 녀석 어디 갔다 이제 왔누’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니까 아이는 바로 옆집으로 심부름을 갔던 것인데, 돌아오는 데는 한나절이 걸린 셈이다. 그림책 속에서 볼록한 이마를 하고서 온 동네를 걸어 다니는 꼬마가 나는 섬에서 본 아이들만큼이나 부러웠다. 


그리고 새삼 놀랐다. 

아이들 앞에 세상은 얼마나 너른 놀이터인지. 

그 안에는 여기저기 마음 빼앗길 일이 얼마나 많은지. 

마음을 빼앗기면 빼앗기는 대로, 

따라가 보는 일은 또 얼마나 즐거운지. 

그럴 때 하루해는 얼마나 짧은지…….


언젠가의 나에게도 그런 하루들이 빼곡했을 것이다. 보아야 할 것만 보고, 해야 할 일만 하는 어른으로 자라는 동안 잊고 있던 것뿐. 그러니 아주 다는 아니어도 가끔은 저 아이들을 따라 어린 나로 살아볼 일이다. 순수한 몰입과 천진한 즐거움의 세계를 완전히 회복할 수는 없다 해도, 짧은 휴가나 여행, 어떤 하루 동안만이라도. 걱정일랑 외투처럼 벗어두고 오직 눈앞의 풍경에만 집중하며 한눈도 팔고 마음도 빼앗기며 가볍게 걸어볼 일이다.


그러고 싶을 때면 생각한다. 지는 햇빛 속에 집으로 돌아가던 어린 날들을. 즐거움이 아직 남아 있어 하루가 끝나가는 게 아쉽게만 느껴지던 날들을. 그런 기분을 늘려가야겠다고 생각하면, 아이처럼 사는 일도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것 같다.      


저무는 해가 아쉽게 느껴지는 날이라면, 
잘 살아낸 하루일 것이다. 
그런 하루가 모이고 모여 삶을 이룬다면, 
그것은 잘 살아낸 삶일 것이다.          



*** 좋아해서 자주 찍었고 오래 머물렀던 25개의 순간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는, 에세이집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게 취미』(2018, 위즈덤하우스) 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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