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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신지 Jan 19. 2019

눈 내린 날은 언제나 좋은 날

나이를 아주 많이 먹어서도 내리는 눈을 반가워하는 사람이고 싶다

가능하면 나이를 아주 많이 먹어서도, 내리는 눈을 반가워하는 사람이고 싶다. 퇴근길의 교통 정체나 다음 날 질퍽댈 더러운 골목길 같은 것을 걱정하지 않고, ‘눈 오는 날’이라는 행운을 다만 반가워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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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면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해야지 


눈이 내리면 우리, 통유리 창이 있는 이자카야에 앉아 술을 마시자. 서늘한 바람이 불고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면 나는 조급하게 굴면서 자꾸 그런 다짐을 받아둔다. 눈이 내린다면 모름지기 그런 풍경에 앉아주어야 예의가 아닌가 싶어서다. 뿌옇게 김이 서린 창, 조금씩 흩뿌리다가 이내 펑펑 내리기 시작하는 눈, “눈 온다!” 누군가 외치면 일제히 창밖으로 향하는 시선, 서로를 모르고서 들어왔다가 술에 취하면 괜히 친밀한 기분이 드는 사람들, 눈가래로 가게 앞을 치우는 주인들의 바쁜 손놀림……. 겨울의 풍경을 채우는 그런 것들이 좋다. 


어느 겨울엔가는 동네 이자카야에서 술을 잔뜩 마시고서 삽살개처럼 골목길을 뛰어다닌 적 있다. 뛰어다니면서 뭘 했느냐면,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에 주차되어 있는 차들의 앞 유리를 닦아주었다. 코트 소매 끝을 바투 잡고, 양팔을 와이퍼처럼 만들어서는 이쪽으로 슥슥, 반대쪽으로 슥슥. 두 번만 움직이면 쌓인 눈이 푸스스 한쪽으로 치워졌다.


눈이 그칠 때까지 술을 마실 요량이었는데, 밤새 눈이 그치지 않았으므로 그때 시간이 새벽 6시쯤 됐을까. 밤새 마셔 취한 채로, 이 차들 모두 곧 출근해야 할 텐데 눈이 쌓여서 큰일이야! 뭐 그런 걱정을 했던 것 같다. 애인이 그런 내 뒤를 쫓아 함께 뛰었다. 삽살개 같은 나를 말리기에는 저도 이미 취해서 그런 나를 보며 와하하하, 만화 속 말풍선 같은 것을 하늘에 띄우며 웃고 있었다.


자원봉사 하듯 두 개의 골목을 클리어 하고 오르막길 끝에 있는 교회 앞에 다다랐다. 누군가 부지런하게 일찍부터 치워둔 눈이 가로등 아래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푹신해 보이기에 대뜸 누웠다. 

와아……. 

가로등 불빛에 비친 흩날리는 눈송이가 벚꽃 잎처럼 고왔다. 

너도 누워봐.

내가 눈 더미를 팡팡 치며 재촉하자, 애인은 좀 망설이는 듯하더니 따라 누웠다. 

예쁘다, 그치. 

응. 


BGM까지 더해지면 정말 근사할 거라고 생각한 순간, 아스팔트 바닥을 긁는 눈가래 소리가 들렸다. 새벽 예배를 준비하러 나온 아저씨들이 바로 곁에서 눈을 치우고 있었다. 덧쌓이고 있는 눈 더미인 줄도 모르고, 좋다고 누워 드라마를 찍고 있었던 셈이다. 그제야 술이 좀 깨는 기분이었다. 


보고도 못 본 척해주시는 아저씨의 묵묵한 눈가래가 내 발치까지 와서 밀어댔으므로 머쓱해져서 일어났다. 미끄러질까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며 당분간 저 앞으론 못 지나다니겠다, 얘기했다. 새벽길 눈을 치우던 아저씨들은 잔뜩 쌓아놓은 눈 더미에 드러눕는 취한 커플을 보며 좋을 때다, 뭐 그런 생각을 하셨으려나.



돌아보면 그때는 정말 좋을 때였다. 

손에 꼽을 만큼 눈이 많이 왔고, 내리는 눈의 양만큼이나 기분이 좋았으며, 그렇다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그건 역시 통유리 창이 있는 이자카야에서 눈이 그칠 때까지 술을 마시는 일이었다!)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던 그 겨울이. 그건 순전히 눈 덕분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런 겨울을, 눈 내리는 날을 기다리지 않을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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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순간은 지금도 흐른다고


겨울의 어느 하루는 궁에 갔다. 밤새 눈이 내렸고, 오전에 마침 반차를 써둔 날이었다. 2시까지 회사에 들어가야 하니 그렇다면 조금 일찍 나서서 눈 내린 창경궁을 걸어봐도 좋겠다, 생각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눈이 아니니까. 게다가 눈 내린 궁을 걷는 행운은 1년 중에서도 몇 번 찾아오기 힘든 기회이므로.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고, 출퇴근으로 이루어진 삶을 시작하면 우리는 생각보다 하루의 많은 시간을 일에 할애해야 한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이렇게 일만 하다 평생이 가겠구나 싶어지는 날도 있다. 출근해서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해야 할 일의 목록이 자꾸 늘어나다 보면, 쉽게 잊게 된다.일 바깥에도 삶이 있다는 걸. 


그래서 틈틈이 일상에 여백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매번 다짐한다). 일과 일 사이, 스스로 ‘틈’을 만들지 않으면 진짜 하고 싶은 것들은 영영 못 하며 살게 되기 때문이다. 너무 열심히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를 말리고 싶어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창경궁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소나무 사이로 난 오솔길에, 감청색 처마 위에 하얗게 눈이 쌓인 풍경을 보려고 어디선가 집을 나섰을 사람들. 그 속에 섞여 궁 안을 느릿하게 한 바퀴 도는 동안 차츰 마음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일상에서 드물게 고요한 시간이 주는, 그보다 드문 마음이었다. 일부러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평소처럼 출근할 시간이 다 돼서야 후다닥 집을 뛰쳐나와 버스에 올랐더라면 느끼지 못했을 마음이기도 했다.


“나는 눈 내리는 거 싫더라. 차만 막히고, 녹으면 더럽고.”


누군가 이런 말을 할 때면 무슨 뜻인지 이해야 하지만 곧 의아해진다. 내리는 눈을 보며 우리는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눈이 더 이상 반갑지 않아지는 순간 어른이 되는 거라는데, 내리는 눈의 아름다움을 보지 않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는 것은 정말 어른의 일이다. 아이들은 눈을 보며 그런 생각은 하지 않으니까. 지금의 눈을 순수하게 반가워하며 그 눈으로 무얼 하면 더 즐거워질까 궁리할 뿐. 그러니 내리는 눈앞에 더 이상 기뻐하지 못할 때, 우리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며 현재를 그런 식으로 날려버리는 것이다.



 지금 창밖으로, 이번 겨울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로.



“이런 날 오니까 좋다.” 궁을 되돌아 나오는데, 앞서 걷던 낯선 이가 말했다. 마음속으로 혼자 대답한다. 정말 좋다고. 이런 날이 있어서, 살아갈 기운이 나기도 한다고. 발가락이 시려 앞서 걷는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 밟는데, 다시 눈송이가 날리기 시작했다. 


함박눈이다! 


이번엔 뒤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고, 우리는 추운 것도 잊고 멍하니 서서 나풀나풀 내리며 굵어지는 눈송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런 순간엔 누구도 차가 막히기 전에 어서 가자든가, 걸음을 서두르자든가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언젠가 읽은 책에서 행복의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 결과를 본 적 있다. ‘행복의 기쁨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아무리 대단한 성취나 환희도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기 마련이므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기쁨을 한 번 느끼는 것보다 다양하고 자잘한 즐거움을 자주 느끼는 것이 행복한 삶에는 훨씬 유리하다는 것. 


‘얼마나 많이’가 아니라 ‘얼마나 자주’. 


그렇게 되뇌며 나는 책의 한쪽 귀퉁이를 접어두었었다. 그러니 우리가 보낼 이 겨울도, 눈이 아주 많이 오는 겨울보다 눈이 자주 오는 겨울이기를. 그럼 좀 더 자주 사진을 찍고, 좀 더 자주 나누고픈 순간을 전송하며, 좀 더 자주 창문에 붙어 서서 웃게 되겠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열 번, 스무 번의 눈 오는 날들을. 

새해엔 그렇게 좀 더 자주, 눈송이 같은 행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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