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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신지 Jan 05. 2019

말을 거는 창문들

내가 가졌던 몇 개의 창窓들을 기억한다


걷다 보면 자주 누군가의 창을 올려다보게 된다. 화분을 내어둔 창을 볼 때면 반가워서, 종이 모빌을 걸어둔 창을 볼 때면 그것을 내건 마음을 짐작해보고 싶어서, 담쟁이덩굴이 온통 뒤덮인 창을 볼 때면 저 창의 안쪽에서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해져서.


바깥에서 바라보는 누군가의 작고 완전한 세계 


창문에는 한 집의 온기와 생기가 함께 묻어 있다. 그래서인지 여행을 하며 누군가의 창문을 올려다보는 순간만은, 성냥팔이 소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래 집 밖에 나와 있는 추운 마음을 녹이려고 첫 번째 성냥을 켜면 따스한 불빛이 일렁이는 난로가, 두 번째 성냥엔 음식이 차려진 식탁이, 세 번째 성냥엔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가 닫힌 창의 커튼 안쪽으로 어른거리는 것만 같은 기분.     


집에 돌아가고 싶어도 집이 너무 멀리 있는 나와는 달리, 그들의 집은 그저 창문 안쪽에 있었다. 누군가를 위한 저녁이 데워지는 고소한 냄새, 달그락거리며 식기가 부딪치거나 슬리퍼가 거실 바닥을 끄는 생활의 소리, 가끔 창가에 다가와 코가 닿을 듯 바깥을 내다보는 맑은 눈의 고양이들. 거기에는 내가 떠나온 생활과 지금 이 순간 그리워하는 모든 것들이 담겨 있었다.     


어떤 도시에 사는 이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창가를 돌보기도 했다. 좁은 창가에 지나는 사람들도 함께 볼 수 있는 작은 정원을 만드는 마음이란 무엇일까. 그럴 때면 내가 사는 도시에선 ‘샷시’가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고 투덜거리던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모두가 비슷한 창을 가지고 산다는 건 생각보다 울적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중으로 닫힌 불투명한 창의 안쪽에서 별다른 것을 꾸밀 생각도 못한 채 산다는 건.   


창 안팎에는 누군가의 작은 세계가 있었다. 가끔 머리를 질끈 묶은 창의 주인이 테라스에 나와 화분에 물을 주거나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다 들어가기도 했다. 낯선 그 혹은 그녀는 이 도시, 저 창가에서 행복한 아침도 불행한 저녁도 모두 맞을 것이다. 커튼을 걷는 순간 미소를 띠게 되는 아침도 있을 테고, 지친 날엔 한숨으로 창문이 흐려지는 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날들엔 저 창을 통해 계절이 바뀌는 기척을, 날씨가 개거나 흐려지는 모습을, 거리의 크고 작은 변화를 느끼곤 하겠지.      


어디서든 쉬이 외로워지는 우리를 위해, 어디서나 비슷하게 이어지는 일상을 보여주는 창들. 창이 있어 우리가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할 수 있다는 건 다행한 일이었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사람은 처음 막힌 벽을 뚫어 창이란 걸 만들어낼 생각을 했는지도.         



안쪽에서 내다보는 한 시절의 풍경들     


밤이면 책상 위 스탠드만 켠 채로 앉아 책을 읽다가 가끔씩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곤 한다.  막다른 골목 제일 안쪽 집, 5층 창에선 골목이 그대로 내다보인다. 맞은편 어둔 건물의 불 켜진 창들이 꼭 가운데를 꾹꾹 눌러 펴놓은 책 같기도 하다. 그 너머로 더 많은 것이 보인다. 건물들 사이로 삐쭉 고개를 내민 나무 몇 그루, 교회의 붉은 십자가, 멀리, 아주 멀리까지도 이어져 있는 불 켜진 창들. 누군가가 저 어둠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표시들. 그것이 지금 내가 보는 작은 세상이다.     


내가 가졌던 몇 개의 창窓들을 기억한다.     


시골의 고향집에는 사방을 향해 창이 나 있었지만, 정작 그곳에서 자랄 때는 창을 별로 의식하지 못했다. 어렸기도 했거니와, 아마 창 안팎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집안 곳곳의 창은 울창한 뒷산이나 오래전 할아버지가 심어두었다는 마당 곁의 자두나무나 지하수를 길어 올리는 펌프식 수돗가를 향해 열려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내가 이제 막 놀다 들어온 풍경이었으므로, 창 안팎의 세상이 그리 다르지 않았다.   

  

날씨 좋은 날, 더러 창을 모두 열어두면 제비 같은 새들이 모르고서 들어왔다가 다른 창을 통해 나가기도 했다. 열린 창으로는 바람도 흘러들고, 그 바람에 흔들리는 뒤꼍 대나무 숲의 푸른 소리도 흘러들고, 저물녘이면 산 그림자와 함께 노을도 스며들었다. 그럴 때 창은 마치 바람도, 새도, 노을도 그렇게 무람없이 드나들라고 만들어둔 것 같았다. 풍경에 틀을 두르기보다 오히려 그 경계를 지우는 창이었으니, 어린 내가 창 자체를 특별하게 의식했을 리 없다.     

서울에 올라와서야 새삼스레 창의 존재감을 자각했다. 그냥 존재감 정도가 아니라 창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고 해야 맞겠다. 스무 살 때부터 셋방을 옮겨 다니며 몇 번씩 사는 곳이 바뀌었는데, 그럴 때마다 새로운 창을 얻게 되었다. 어떤 창을 가진다는 건, 하나의 풍경을 가지게 된다는 뜻과 같았다. 못해도 1년, 길게는 3~4년씩 같은 창을 통해 하나의 풍경을 보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집을 구할 때 창이 어디로 나 있고 어떤 풍경을 담고 있는지는 자연스레 중요해졌다. 작은 창문을 삐걱거리며 열면 바로 앞 건물에 시야가 막혀버리는 집은 다른 조건이 좋아도 자연스레 선택지에서 지워졌다. 


내게 방을 고르는 일은 창을 고르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계단이 너무 많거나 너무 낡은 집이더라도, 풍경이라 부를 만한 걸 담고 있는 창을 갖고 싶었다. 무엇보다 당분간 살아갈 집을 고르는 데에, 그런 선택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서울에 올라와 처음 가진 창은, (삼촌 집에 얹혀살았으므로) 딱히 선택권 없이 만나게 된 창이었다. 1층에 치킨집이 있는 건물의 4층이었는데, 덕분에 오픈 시간인 6시만 되면 기름 냄새가 창으로 흘러들었다. 그 창으로는 골목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건물의 창이 마주 보였다. 가깝다고도 아주 멀다고도 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 창의 주인과 나는 서로를 의식하면서도 의식하지 않는 듯 지냈다. 


늦은 밤 책상 앞에 앉아 있다 고개를 들었을 때 마침 커튼 안쪽의 불이 켜지면, ‘이제야 들어왔네’ 생각하기도 했고 창에 내둔 화분이 말라가는 것을 걱정하기도 했다. 그 집에서 제법 오래 살았기 때문에 나는 창의 주인이 바뀌는 것과 그럴 때마다 함께 바뀌는 커튼이나 화분의 모습도 지켜보게 되었다. 커튼에서 무채색 블라인드로, 선인장에서 각종 허브로 바뀌는 이웃의 취향을 지켜보는 사이에 몇 년이 흘렀다. 


두 번째로 가졌던 창은 비탈길을 따라 제법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집들이 다닥다닥 엎드려 있는 오래된 동네의 지붕들이 내려다보였다. 밤이면 그 지붕들 위로 달처럼 십자가가 떴다. 나는 창 아래서 책을 읽거나 일기를 끼적이거나 라디오를 듣다가 고개를 들어 밤의 지붕들을 바라보곤 했다. 새벽녘까지 깨어 있는 날이면 종종 늦게까지 불 켜진 창들의 주인은 누구일까 상상하기도 했다. 저 창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또 어떨까. 나와 마찬가지로 불 켜진 다른 창들을 궁금해하기도 할까 하면서.



세 번째 창은 다세대주택 1층에 있었다. 옛날 집 안방이라 제법 크게 난 창으로는 주인집 마당의 감나무가 내다보였다. 그 나무 덕분에 여태껏 살았던 어떤 집에서보다도 쉬이 계절의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다. 창 너머 가지 끝에 연둣빛 새순이 올라온 것을 보며 봄을 예감했고, 작은 전등갓처럼 안쪽을 환히 밝힌 감꽃을 보며 여름을 예감했다. 가을이면 탐스런 감들이 발갛게 익어 배고픈 새들을 불러 모았다. 겨울이면 아침마다 커튼을 젖히면 나뭇가지에 소복이 눈이 쌓여 있을 풍경을 상상하기도 했다. 커다란 창이 마당을 향해 열려 있는 그 방이 내겐 어느 곳 보다 제일 ‘집’ 같았다.


네 번째로 가진 창은 3.5층에 있었다. 큰 창은 아니었지만, 길게 뻗은 골목길을 향해 있어 앞 건물에 시야가 가리지 않는 위치라 좋았다. 꼭대기 층이어서인지 그 창으로는 유난히 골목의 크고 작은 소리들이 잘 넘어 들어왔다. 친구 이름을 부르며 해 지는 골목길을 달려 내려가는 아이들 소리, 길 위로 차닥차닥 발바닥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걷는 커다란 개,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늦가을부터 겨울이 다 가도록 골목길 구석구석을 누비며 “찹쌀떠억”을 외치는 아저씨, 일요일 아침마다 경쟁하듯 잠을 깨우던 과일 트럭과 채소 트럭의 확성기 소리……. 그 소리를 들으며 침대에 누워 있을 때면 생각했다. 이 집을 떠나면, 이곳에서 보낸 시간은 창을 통해 흘러 들어오던 소리들로 기억되겠지 하고.


그리고 더 많은 창을 기억한다. 내가 잠시 가졌던, 한 시절의 풍경을 담고 있는 창들. 창이 나를 매료시킨 이유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창은 지금 이 순간의 세상만을 담는다.
흘러가고 있는 시간 중에 바로 지금,
세상의 풍경 중에서도 단지 이만큼만.
두 손을 겹쳐 모아 샘물을 떠올리듯,
현재에서 이 순간과 풍경만을
오롯이 떠내어 보여준다. 


어쩌면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때 그 순간을 그런 식으로 마음속에 담아두었다는 뜻이리라. 내가 지나간 한 시절을 그때 살았던 창가의 풍경으로 기억하듯이.


오래전 여행을 하며 창문 바깥에 서서 안쪽을 그리워하던 나는, 이제 생활을 하며 창문 안쪽에서 바깥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꼭 멀리 갈 필요는 없는 거라고. 산다는 건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지금 눈앞의 세상을 잘 담아두는 일이라고.     


그래서 오늘도 불 밝힌 5층 창가에 앉아 조용히 창문 너머 풍경을 본다. 해가 뜨고, 또 지고, 계절이 흐르는 지금 내 눈앞의 유일한 세상을. 시간이 지나면 그리워질 것이 분명한 나의 다섯 번 째 창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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