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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Apr 26. 2023

배에 구멍이 생겼다

그것도 두 개나 

일평생을 꽤나 튼튼한 편이었다.라고 하기엔 매일 같이 코피를 흘렸고, 까딱하면 체해서 데굴데굴 굴렀다. 하지만 역시 비교군이 누구냐에 따라 나에 대한 정의는 바뀌기 마련이니까. 어릴 적부터 저체중에, 매일 같이 이유 없는 두통과 구토감에 시달리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감기몸살을 꼭 앓아야 했던 '연약' 그 자체인 동생에 비하면 매우 건강 체질로 분류되었달까. 또래에 비해 발육도 빠르고 운동도 잘했고. 


20년이 지난 지금, 아무도 건강을 단언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다소 허약한 사람이 되었다. 초등학교 때까지 늘 반에서 가장 컸던 키는 딱 만 30세 여성 평균으로 수렴했고, 다이어트가 인생 최대 고민이었던 시기가 무색하게 근육량을 걱정하는 저체중과 정상체중 사이의 비실이가 되었다. 키와 체중뿐만 아니다. 밖으로나마 강했던 정신도 어느새 흐물흐물 독기가 풀려 외유내유로 변한 지 오래다. 


잃고 나니 소중했다고, 한동안은 건강하지 못함을 자책하기도 했다. 하지만 녹아내리는 내 몸과 마음에 매어있다가도 점점 나만 유달리 힘든 게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된다. 다른 이들은 그들만의 약한 사정들이 있고, 무딘 부분이 있음을. 그냥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된다. 튼튼하기도, 그렇지 않기도 한 나와 당신의 모습에 깊게 동요하지 않고 '그럴 수도 있겠다. 잘 관리하면서 살아야지.' 넘어가게 된다. 아니, 넘어갈 수밖에 없다. 




작년 말, 건강 검진에서 이상 소견을 받고 동네 병원과 대학 병원에서 추가 검사를 받았다. 수술을 꼭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솔직히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꼭 해야 하나? 귀찮은데.', 두 번째로 든 생각은 '회사는 어쩌지'. 세 번째로 든 생각은 '돈 아깝다.'였다. 시간과 돈을 맞바꾸는 데에만 혈안이 된 현대 도시 노동자다운 생각이다. 그래도 이내 '아냐, 그래도 제때에 몸 고치는 게 먼저지.'라고 사람답게 생각을 고쳐 먹는 데 성공(?)했다.


그래도 수술대에 눕는 건 처음이라 휠체어를 타고 수술방 앞에 가니 긴장됐다. 드라마에서 본 차가운 금속 느낌과 이것도 일상이라는 듯, 나름대로 멋을 부린 크록스 슬리퍼들. 교수님께 깍듯하게 인사하다가도 그 새를 못 참고 장난을 치는 젊은 의사들. 아무리 면피용 조항이라지만 수술하다 장애가 생기거나 심한 경우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하며 동의서에 사인을 받아가는 막내들. 취소된 스케줄에 평범한 직장인처럼 기뻐하는 간호사실. 언제나 가장 고된 일을 하지만 계급 사회의 가장 아래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는 환자와 수술복을 실어 나르는 직원들. 


20여 분을 덩그러니 놓여 이 사회를 구경하다 드디어 웨이팅이 끝나고 수술대 위에 누웠다. 방금 막 끝난 수술의 흔적이 카페 테이블 치우듯 사라지고 힘없이 벗겨지는 상의. '저 의사 선생님 귀걸이가 수술하는 동안 내 뱃속으로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하면서 잠에 들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배에 난 구멍 두 개가 모두 막힌 채로 회복실이었다. 7센티짜리 혹을 이 작은 구멍으로 어떻게 꺼냈을까, 내 배는 괜찮은 건가 뒤늦게 프로세스가 궁금해지지만 대답해 줄 사람이 있을 리가. 


하루 정도 허리를 펼 수 없게 아프더니, 이제 집에 가면 된단다. 피주머니와 팔목에 꽂힌 주삿바늘이 빠져나간 자리가 시원섭섭하다. 재발률이 50%라는데, 피가 날 수도 있다는데, 아플 수도 있다는 데. 여기 더 있는다고 건강해지는 것도 아니니 가라면 가야지. 진통제 아홉 알과 주의사항이 빼곡히 적힌 서류 몇 장을 들고 퇴원했다. 내가 뭘 어떻게 하나.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여러 의미로 건강 앞에선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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