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이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그렇게 소중하다는 자유 시간이 생겼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by 사이

2019년 4월 즈음이었나. 한창 바쁜 시즌이 끝났던 건지, 중간에 하루 정도 짬이 났던 건지 정확하진 않지만 오랜만에 정시 퇴근을 했다. 해가 지기 전에 퇴근하는 것이 너무 낯설어서 저녁 시간을 무엇을 하며 보내야 할지 모르겠더라. 대학교 때부터 자유를 부르짖었는데, 고작 2년 만에 막상 나의 온전한 시간이 생겨도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니. 석촌호수 동호와 서호 사이를 서성이며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그 뒤로 3년이 흘렀고, 나는 아직도 가끔씩 찾아오는 나의 시간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다. 회사와 계약되지 않은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잉여' 시간을 과연 내가 원하는 게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다. 언젠가부터 "휴가 쓰면 뭐해. 할 것도 없는데.", "집에 가면 뭐해. 돈이나 벌어야지."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원래도 비생산적인 시간과 과정을 잘 견디지 못하는 편이긴 하지만 어쩐지 점점 심해진달까.


대학생 때는 그래도 나름대로 '생산성' 할당량을 채우고 나면, 얼마간의 '비이성적인, 비효율적인, 비생산적인' 시간을 용인하고 나를 어르고 달래고 지속 가능하게 하기 위해 활용했는데 요즘은 생산적인 (척하는) 시간과 전원이 꺼진 시간만 존재할 뿐이다. 공부를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스터디를 한 뒤, 팟캐스트를 들으며 산책을 하거나 독립 영화나 내 취향 감독의 작품을 몰아보거나 뭐 아무튼 결과물이 나오지 않더라도 내적 동기에 의해하는 무엇이 한두 개쯤은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인지 명확한 'OUTPUT'을 내지 않는 행위는 리스트 자체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가외 시간에도 사이드 프로젝트, 재테크 등 또 다른 먹고사는 방법에 대해서만 고민했다. 대화의 절반 이상이 커리어와 돈에 대한 이야기로 변해갔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오랜 학생 신분에서 벗어나 경제인(?), 생활인(?)이 되었고, 자기 앞에 놓인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는 것은 응당 당연한 것이니까. 하지만 사회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큰 탓일까, 생존에 대한 위협을 느낀 탓인가 어느 날부터 나라는 인간보다도 경제활동인구로서의 역할이 더 커진 기분이었다. 나라는 인간이 잘 살기 위해 경제인으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인으로서 기능하기 위해 나를 가지치기해내고 있었다. '나의 이런 기질은 회사 생활하는 데 맞지 않으니까' 외면하고, '이런 태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지웠다.


글은 반골 기질을 타고난 나를 받아들이는 시간이 아니라 밥벌이 수단이 되어버렸고, 요가는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시간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훈련으로 변했다. 예술은 개인과 세계의 모순으로부터 위로받는 시간이 아니라 그저 상품으로 여겨졌다.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몇 시간을 기다리던 나는 카메라가 무겁다며 내려놨고, 대화를 위해 몇 시간씩 걷던 나는 "넵" 이외의 어떤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나를 부정할수록 회사원으로서의 퍼포먼스도 컨디션도 올라가기는커녕 덩달아 곤두박질쳤다는 것이다. 이걸 잘하려고 한 건데, 이것도 못하게 되다니. 전원이 꺼진 시간이 길어졌고, 회사 밖에서도 회사에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운이 좋아잠깐의 휴식을 갖게 되었지만, 지금 주어진 한 달이라는 빈 시간을 내가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자본가가 아니어서 '잉여'를 소유해본 적이 없는 탓일까. 벌써 노동자의 지위에 익숙해져 버린 걸까. 부자들에게는 돈보다 중요한 게 시간이라고 하던데. 돈이 아직 부족해서 그런가 나는 하고 싶은 게 전혀 없다. 전처럼 할 것도 없는데 돈이라도 좀 더 벌겠다고 입사일을 당기지 않은 게 기특할 정도. (곰곰이 생각해보니 두 개 정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차를 사서 내 힘으로 여기저기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고, 나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그림을 계속 배우고 싶다. 다 돈이 많이 드는군. 이러니 내가... 돈에 미쳐? 가지고... 에잉 쯧)


이대로 가다간 백만장자가 될 때까지 버틸 수도 없겠지만, 운이 좋아 부자가 되더라도 혼자 불행하게 시간을 죽이고 있을 것 같아서 꾸역꾸역 힘을 내 미국까지 왔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좋아한다고 믿어왔던 것들, 덜 중요하다고 생각해 미뤄두었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어보고 있다. 내 마음속을 찬찬히 뜯어보는 게 역시나 아직은 어딘가 불편하고 공허하다. 그래도 다시 천천히 펼치다 보면 잃어버렸던, 혹은 아직 내가 몰랐던 나를 만나게 될 수 있을까. 내 안의 작은 의지나 동기를 발견할 수 있을까. 다시 일어나서 뚜벅뚜벅 걸어갈 힘이 생기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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