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열 시에 잠들어서 오후 네 시에 일어나는 삶
시차 적응에 완벽하게 실패했다. 첫날은 친구가 준비해둔 샴페인을 마시고 열 시에 잠드는 데 성공했지만 새벽 두 시에 깨버렸고, 다음날인 어제 결국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미술관을 나와 발보아 파크 주차장에서 낮잠을 세 시간이나 자버렸다. 어젯밤엔 애초에 잠자기를 포기하고 글을 쓰고 책을 봤는데 언제 잠든 건지 눈 떠 보니 또 새벽 두 시. 한국 시간으로 오후 여섯 시다. 한국에서 딱 낮잠 자고 배고파서 일어날 시간인가.
아무튼 오늘 아침 다섯 시 반까지 다시 잠들지 못하다가 친구가 아침 출근길에 유명한 라호야 쇼어에 내려준다기에 일곱 시 반에 겨우 일어나 집을 나섰다. 해변에 도착하니 아침 아홉 시. 잔디밭에서는 요가 수업이 한창이고 스쿠버다이빙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들이 물에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다. 가까운 해변엔 카약과 서핑 보드가 켜켜이 쌓여 있고, 벌써 물속으로 뛰어들어간 이들도 보인다. 오메 부지런한 거. 친구가 저 요가 그룹에 껴보는 건 어떠냐는 말을 남기고 함께 떠났지만 난 몸을 움직일 생각이 전혀 없다. 슬금슬금 난생처음 보는 바다 근처로 가보긴 한다만. 멋지긴 한데 지금은 한국 시간으로 새벽 1시. 졸려 죽겠다.
모래사장에 돗자리를 깔려고 보니 딱 봐도 축축하다. 구글맵을 켜서 녹지를 찾는다. 오호 삼십 분쯤 걸어가면 오션뷰의 탁 트인 공원이 있네. 동네 구경 좀 할 겸 이동해볼까. 바다를 등지고 나오니 와우, 이 동네 잘 사는 동네인가 본데. 고급스러운 상점들이 즐비하다. 비싼 자동차에 클래식 카까지. 자동차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부내가 솔솔 풍긴다. 동네 구경하며 십분 쯤 걸었을까. 아, 벌써 체력 방전. 다행히 근처에 버스가 있다. 이 동네 배차 간격 엉망이니까 놓칠 수 없지. 잽싸게 140번 버스에 올라타서 공원 앞까지 갔다.
어제 야외 낮잠의 교훈 상 햇볕 바로 아래는 뜨겁고, 그늘은 너무 추우니까 나무 밑 그림자와 햇살 사이에 자리를 펴고 벌러덩 누웠다. 아 이 온도야. 최적의 온도. 머리를 대자마자 기절. 얼마나 잤을까. 얼굴이 뜨거워 몸을 일으켜보니 나무 그림자가 시계 방향으로 조금 움직였다. 몸을 굴려 다시 그늘 반 햇살 반 존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까. 나무 밑동 반 바퀴를 돌아 어느새 오후 네 시가 넘었다. 이제야 정신이 좀 들면서 죄책감도 같이 몰려온다. '아니 여기까지 와서 하루의 1/3을 잔 거야?' '이럴 거면 한국에서 자지 왜.'
아니 근데, 내가 백수일 때 아니면 언제 나무 귀퉁이 그림자랑 같이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낮잠을 자보겠어. 한국 시간으로 아침 여덟 시 밖에 안되었는데 이 정도면 양호하지 뭐. 한국 시간으로 살다 가야 돌아가서 적응하지 뭐.
친구랑 저녁을 먹기로 해서 그래도 그 전에 태평양에 발이라도 담가보자며 모래사장으로 내려갔다. 오일 바르고 선탠하는 사람. 사진 찍느라 바쁜 사람. 파라솔 아래 누워서 스마트폰 하는 사람. 그냥 자는 사람. 이 사람들도 나처럼 쉬면서 죄책감을 느낄까. 위축된 마음을 조금 풀고 조심스럽게 양말을 벗고 모래를 느껴본다. 발을 묻어두고 꼼지락꼼지락 일기 쓰면서 사람 구경하다 보니 시간이 또 금방 흐른다. 비키니에 훌렁훌렁 탈의하고 바다로 들어가는 젊은 커플을 보고 용기 내어 물에 가까이 가보니 "!!!!" 아니 이 사람들은 지금 이렇게 차가운 물에 이렇게 다 벗고 들어간 거야? 젊다. 젊어. 나 수건도 없는데. 후다다닥 뛰어 나와 햇빛에 발바닥을 말리며 모래알을 털어낸다.
띵-! "나 이제 퇴근할 것 같은데, 잘 살아 있어?" 문자 알람이 울린다. 이걸 잘 살았다고 해야 되냐. 아무튼 오늘 계획은 다 소화했으니 뭐. 바다 보고 누워있다가 물에 들어가 보기. 내일은 뭘 할까. 아니 당장 오늘 밤은 뭘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