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도 변화도 어색하고 힘들어하면서
겁이 많은 편이다. 잔걱정도 많고, 큰 고민도 많다. 대충 예민하다는 뜻이다. 남들 그냥 넘어가는 것도 곱씹고 곱씹느라 한 세월이 걸리고, 굳이 안 해도 되는 고민을 한참 미리 사서 한다. 지나가버린 과거에 대한 후회와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일기장이 까매진다. 그런데 또 현실적인 욕심도 많아서,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건 어찌나 많은지. 다 움켜쥘 수도 없는 것을 가지려고 매일매일 열심히도 산다. 둘 중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자기반성하랴 전력 질주하랴 감독 노릇에 선수까지 하려니 힘이 쭉쭉 빠진다.
이런 나를 데리고 살기 위해 평소에 운동도 하고 일기도 쓰고 나름의 방식으로 열심히 충전을 해보지만 그게 또 말처럼 쉽나. 여기저기 예상치 못한 사고에 치이면서 hp가 훅훅 줄어든다. 그뿐이랴. 대기업에서 만드는 휴대폰 배터리 수명도 2년만 지나도 훅훅 떨어지는데, 삼십 년이나 산 내가 에너지 효율이 좋을 리가 없다. 이제 작은 터치도 치명상이 될 수 있으므로 완전히 꺼져서 맛이 가버리기 전에 icloud 관리도 하고,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도 해줘야 한다. 저전력 모드는 필수다.
불시에 갑자기 고장나버리면,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해내던 일도 '내가 지금 뭘 위해 이걸 이러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며 하기 싫어지고. '남은 건 아무것도 없고, 지친 나 하나 남았다'는 생각에 그동안 해온 것이 헛되게 느껴진다. 이제 더 이상 '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없다며' 살아보지도 않은 내 인생을 마구 후려치게 된다. 그렇게 아무 의미를 못 찾고 그저 하루하루 버티는 날들이 계속된다. 충전선을 꽂아놔도 접촉 불량인지, 좀처럼 다시 켜지지 않는다.
이런 상태가 되면, 무려 3년 만의 해외 여행을 앞두고도 “여행 그거 뭐 밖에 나가서 돈만 쓰다 오는 거. 사람 사는 데 다 똑같지. 뭐가 좋다고 가."는 말이 절로 튀어나온다. 내 마음에 나에게 내어줄 조금의 여유도 남아 있지 않은 탓이다. 오죽하면 떠나온 후에도 그런 마음이 계속 들었다. "왜 이 먼 샌디에이고까지 왔나. 도대체가 뭘 하겠다고. 뭐가 달라진다고."
그런데 오늘, 미션 베이에서 수상 요가를 끝내고 보드 위에 누워 둥둥 떠다니는 찰나의 순간에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떠나온 이유가 어렴풋이 기억났다. 억지로나마 갖은 귀찮음을 이기고 일상을 떠나면, '(어차피 다 똑같겠지만) 그래도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라는 마음으로 바깥으로 나가게 된다. 비록 이미 다 알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인 걸 알면서도, 다신 여기 올 일 없을지도 모르니까 미술관으로 들어가고. 별반 다를 거 없겠지만, 기왕 나왔으니 현지인처럼 공원에 누워서 낮잠도 자고. 어차피 같은 물이겠지만 온도 체크나 해보자며 바다에 발을 담그고. 이 사람들도 다 핸드폰만 보고 있겠지만, 각양각색의 사람들 구경도 좀 하고.
그렇게 아주 평범하고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오래되고 익숙한 습관을 하나씩 꺼내다 보면, 몸이 조금씩 풀린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하고 더 자주 웃고 더 자주 들썩인다. 그리고 이제 다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나의 욕망이 저 깊은 곳에서 하나씩 피어오른다. 막연하게 막막한 현실 앞에서 숨어버린, 바라기도 전에 포기해버린 것들. 먼 옛날에 내 취향이 아니라고 단정 짓고 쳐다도 보지 않은 것들. 한 때 좋아했지만, 이제 빛이 바랬다고 생각했던 것들.
휴양지에 별장 하나쯤 갖기. 그 시간을 함께 보낼 코드 잘 맞는 신랑 찾기. 연중 온화한 날씨에 살기. 직접 운전에서 시도 때도 없이 돌아다니기. 가끔은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시원하게 소리 지르기. 모르는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기. 노래 부르고 춤 추기. 바다에 둥둥 떠있기. 해변과 공원을 따라 많이 걷기. 모르는 동네에서 요가 클래스 듣기. 그림 배우기.
어느새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것들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늘어난다. 시포트빌리지에서 산책하다가 내친김에 페리 타고 코로라도 섬 다녀오기. 패들 보트 위에서 요가하고 낮잠 자기. 서부 온 김에 샌프란시스코 다녀오기. 며칠은 친구 집이 아닌 호텔에서 수영도 하고 조식도 먹고 편하게 쉬기. 아울렛에서 그동안 참은 쇼핑 합리적으로 원 없이 해보기. 남은 시간 수상 레저 더 많이 즐기기.
온 데 간 데 사라졌던 이 위시 리스트를 다시 마음에 적고 움직일 힘을 얻기 위해 그토록 겁과 욕심도 많은 내가 시간과 비용을 때려 부어 낯선 곳으로 떠나왔던 것같다. 낯선 곳이 아니라, 낯선 변화에도 나만의 방식으로 잘 살 수 있는 나를 만나기 위해. 다 사람 사는 동네, 그다지 새로운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왕 여기까지 흘러왔으니 한번 해보기나 하자는 마음. 그 작은 마음의 충전기를 찾아 또 당분간 현생을 잘 살아보겠다는 나를 보려고 코로나 이전의 내가 그렇게 주기적으로 내 삶의 터전을 떠나왔던 게 아닐까.
시차 적응보다 어려운 사회 적응. 물과 음식보다 쉽게 바뀌는 사람의 마음과 관계. 현실에서 내 앞의 모든 문제가 너무 거대해서 아무것도 할 용기가 나지 않을 때 "한 번 해보기나 할까"하는 마음. 그냥 되는 사람도 물론 있겠으나 나의 예민하고 욕심 많은 기질을 바꿀 수는 없으니, 앞으로는 조금 더 에너지가 남아있을 때 더 자주 떠나 자신감을 충전하고 오기로. 여행지에서 익숙하고도 낯선 나를 만나 데리고 돌아가 현실을 또 잘 살아가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