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하와 놀다가 돌아간다.
갑자기 그 먼 샌프란시스코를 간다고
샌디에이고 여행 중 잠깐(?) 샌프란시스코에 다녀왔다. 예정에 없던 일정이었다. 미국 땅덩어리가 얼마나 큰데, 서울이랑 제주보다 먼데, 집 앞 가듯이 갈 거리가 아니다. 마음 크게 먹고 가야 되는 곳이다.
그런데 문득 캘리포니아에 다시 온 김에 초등학교 때인가 윤선생 영어 학습지에서 배운 'golden gate bridge'나 보고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는 김에 유명한 현대 미술관(SFMOMA)도 가보고. 사실 다른 건 뭐가 있는지도 몰랐다. 미국의 판교라는 실리콘밸리 정도?
하루 이틀이면 될 일정이었지만, 그동안 쌓인 휴먼 데이터 상 나에게 2박 3일은 너무 급하고 4박 5일은 너무 늘어지기에 3박 4일의 넉넉한 일정을 잡았다.
'일단 항공편과 호텔이 정해졌으니, 그냥 가보지 뭐.' 하지만 시차 적응을 하지 못한 덕에 떠나기 전 날 새벽 구글맵을 펼쳐두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걸 계획이라고 할 수 있는가)
day 1 샌프란시스코 현대 미술관 갔다가 + 슈퍼 두퍼 버거 먹기
day 2 케이블카 타고 시내 구경 + 부딘에서 클램 차우더 수프 먹고 자전거 빌려서 금문교 너머 소살리토 다녀오기
day 3 늦잠 자고 쇼핑하기 (구글을 가볼까했지만, 남의 회사 가서 뭐해…로 마음을 굳혔다. 그럼 근처에 스탠포드 대학…? 이 나이에 굳이 대학을…?)
day 4 호텔에서 모닝 수영 + 체크아웃 후 근처 카페에서 글 쓰다가 샌디에이고로 돌아가기
별 계획이 없던 덕에 대부분을 하고 돌아왔지만,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호텔의 푹신한 침구와 실내 수영장의 따뜻한 물 온도. 장기하의 새 앨범 <공중부양>. 생각보다 맑았던 하늘. 민트향이 나는 커피. 샌디에이고 아웃렛에서 시큐리티 택을 제거해주지 않은 덕분에 꼬리가 덜렁덜렁거렸던 트렌치코트. 이런 것들이다.
눈에 걸리는 풍경이 없다
공항에서 지하철을 타고 powell street에 내려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받은 첫인상은 '생각보다 날씨 좋은데?' 그리고, '아 나는 밀집된 도시 사람이구나. 익숙하네.' 정도였다. 날이 좀 추워서 그런지, 이전에 너무 많은 풍경을 마음에 담아서 그런지. 딱히 눈에 걸리는 풍경이 없었다. 코로나 때문에 도시가 비교적 한적해서 그런가. 그냥 강남 한복판에 있는 느낌.
샌프란시스코 미술관도 LA의 the broad나 런던의 tate modern만 못했고, 슈퍼 두퍼 버거도 인 앤 아웃보단 맛있지만 동부보다 못한 느낌이었달까. 명품 거리는 서울처럼 붐비지는 않았지만 글로벌 브랜드가 달리 글로벌이겠는가. 창 밖에서만 봐도 그게 그거였다.
케이블카 시간은 엉망이고, 심지어 케이블카에 탔더니 운전수와 티켓 확인하는 아저씨가 쌍욕 하면서 싸운다. 오들오들 떨면서 찾아간 클램 차우더 수프도 흠 그냥 뭐. 바다를 따라 걸으며 금문교로 향했지만, 날이 추워서인지 멀찍이서 보고 나니 더 이상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친 물가의 동네에서 호캉스라니
예술가의 마을로 자전거 여행은 접어두고,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푹신한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눈을 감았다 뜨니 이미 하루가 다 갔다.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이틀이 다 간 건가. 코로나 때문에 수영장 운영 시간도 제한이 있다. 아니 이럴 거면 왜 굳이 남쪽 끝에서 북쪽 끝으로 날아왔나. 샌디에이고에도 좋은 호텔 많은데. 아니 서울에도. 또 약간 현타가 온다.
유튜브에서 나오는 목소리도 다 시끄러워서, 끄려던 찰나. 장기하가 말한다. "가만있으면 되는데 자꾸만 뭘 그렇게 할라 그래." 그래서 가만히 모로 누워 계속 가만히 있기로 했다. 노래인지, 랩인지, 나에게 거는 말인지, 책인지 장르를 알 수 없는 그의 새 앨범 <공중부양> 다섯 곡을 들으며 늦은 새벽까지 뒹굴 거렸다.
모히또에서 샌프란시스코 한 잔
셋째 날에는 느지막이 일어나 작정하고 돈 쓰겠다고 왕복 세 시간 걸려 리버모어 아웃렛으로 갔다. 일단 배고파서 푸드코트에서 10불짜리 미국식 중국 음식으로 배에 기름칠을 했다. 그리고, 그날 쓴 돈은 그게 끝이었다고 한다. 돈을 쓰겠다고 마음을 먹어도 왜 쓰지를 못하니. 이럴 거면 한국 가서 명품백 사자 사.
마지막 날에는 그래 이왕 4성급 호텔에 호캉스 왔다면 '수영은 한번 해야지.' 하고 세 시간 자고 비몽사몽으로 수영장 오픈 시간에 내려갔다. 다행히 물은 따뜻했고, 사람도 없었고 한 시간 동안 신나게 물에서 뒹굴었다. 체크 아웃을 하고 이 말도 안 되는 지형을 오르고 내리며 그 유명한 러시안 힐? 램프란트 거리까지 걸어갔는데. 흠. 이게 뭔가. 그 흔한 인증샷 한 장 남기지 않고 계속 장기하의 노래나 흥얼거리며 햇살이 반짝이는 샌프란시스코 거리를 정처 없이 걸었다.
공항으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mint mojito 맛 나는 커피로 유명한 Philze coffee. 민트도, 모히또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한번 먹어나 보자고 시켰는데 꽤 맛있다. 부러움을 모르는 장기하가 같이 있어서 그런가. 가만히 낙서나 하면서 커피를 홀짝이는데, 행복하다. 한국 가면 장기하 에세이 집부터 사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