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와 이직 사이, 태평양으로 갑니다
회사와 이야기가 끝나고 주변에 조심스럽게 퇴사 소식을 전했다. 어디로 이직하는지보다 언제부터 출근하냐는 질문을 더 많이 받은 것 같다. 운 좋게 4주를 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자 직업 직군 직무 불문 이직보다 쉬는 게 더 부럽다며 난리가 났다. 심지어 꽤 자유롭게 시간을 쓰고 계신 부모님마저도 얼마나 부러워하시던지.
게다가 쉬는 동안 미국의 따뜻한 해변 도시로 2주간 여행을 간다고 하니, 거의 결혼식 신랑 신부 행진보다 더 많은 축하를 받았다. 슬픔을 위로해주는 것보다 좋은 일을 축하해주는 것이 더 힘들다던데, 내 행복을 이렇게 진심으로 좋아해 주는 주변 사람들이 많다니 새삼 찡하다.
물론 세상에서 자식 걱정 둘째가라면 서러운 엄마 아빠는 "이 시국에 무슨 해외여행이냐.", "국내에서 바람이나 쐬라." "엄마 밥 먹으면서 축난 몸 좀 회복해라." 성화였지만. 아니, IS 테러 때 유럽도 잘만 다녀왔는데 갑자기 왜 이러신대 이 양반들. 엄마, 나 세 살 아니고 서른살이라구요. 라고 했다가 바로 눈째림으로 맞았다.
사실 센 척은 했지만, 굳이 가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 여권 만료가 6개월도 남지 않아 새로운 여권으로 재발급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출국 직전 알게 되었고, 해외로 나가려면 각종 서약서와 코로나 검사서, 백신 접종증명서 등 연말정산보다 귀찮은 서류들이 엄청 필요하다는 것도 한몫했다.
이제 웬만한(여자 혼자 갈 수 있는 안전한) 미주와 유럽의 주요 도시와 미술관은 다 다녀왔는데. 시간과 돈만 있으면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쉬고 즐길 수 있는데, 체력도 예전만 못한데, 환율도 역대 최대인데, 가지 않을 이유를 세어보니 끝도 없었다.
다행히 자신 있고 빠른 의사결정을 하기에는 소심하게 위축되어 있는 내 곁에 여전히 에너지 넘치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친구들이 있었다. "넌 한국 밖으로 나가서 돌아다녀야 회복되는 사람이잖아." "이왕 쉬는 거 확실하게 쉬어야 돌아와서 다시 열심히 하지." "지난 이직 때, 이틀 쉬고 새 회사로 출근했던 거 기억 안 나? 앞으로 더 떠나기 힘들어질 걸 알잖아." "영아야 그냥 비행기 표부터 끊어. 무조건 가는 거야." "막상 가면 누구보다 재밌게 놀 수 있잖아." "가서 뭘 하려고 하니까 그렇지. 그냥 가서 바다 보고 쉬다 와."
떠나는 날 아침부터 코로나 검사에, 법원 등기 신청에 이러다 비행기를 놓치는 건 아닌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번에도 귀찮아도 꼭 떠나야한다며 모든 서류 업무를 챙겨주고 등 떠미는 사람, 편하게 가라고 타다길을 깔아주는 사람, 용돈을 챙겨주는 언니 같은 친구 덕분에 지금 나는 인천공항 32번 게이트에 눕다시피 앉아서 브런치나 뚝딱거리고 있다.
사람이 없는 월요일 오후의 인천공항, 이제야 실감이 난다. 체크인을 마치고 환전 신청한 돈을 찾고 유심칩까지 챙겨 출국심사까지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해외여행 가는 법을 다 까먹은 줄 알았는데, 아직 몸이 기억하고 있나 보다.
목베개에 바람을 후후 불어넣으며 비행기에서의 시간을 그려본다. 그동안 내 안에 크게 얹혀있던 무엇인가가 쑥 내려가는 기분. 요즘 자꾸 불안하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걱정이었는데, 의식적으로 숨을 불어넣어서인가. 두려운 마음도, 호흡 곤란도 사라졌다. 아 드디어 내가 진짜 회사를 완전히 떠났구나. 마침내 진짜 이별의 시간이구나. 마침 오늘이 일주일 정도 남은 연차를 소진하고 진짜 서류상으로 퇴사를 하는 날이다. 이제 진짜 쉬러 가볼까. 다녀올게요. xox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