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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제 Nov 12. 2015

수능, 수고했어요.

세상을 향한  첫걸음을 땐 그대들에게


10여 년 전, 아침 일찍 가방을 둘러매고 엄마가 싸준 따끈한 도시락을 들고 그렇게 집을 나섰다. 11월의 한기가 몹시도 추웠던 어느 날이었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 시험장 앞에는 선배들의 시험 대박을 기원하는 후배들과 아들 딸들을 응원하는 부모님들로 소리 없이 북적였고, 드디어 온 그날이 실감 나지 않은 나는 멋쩍어하며 시험장으로 들어섰다.





단 하루 한 번의 시험으로 나의 진로가 결정이 된다. 매번 쳤던 모의고사와 비슷하게 치러졌지만, 이건 연습이 아니라 실전이었다. 그 생각만으로도 긴장이 되어 1교시 언어 영역이 시작되자 미세하게 손이 떨렸던 것도 같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내 적응을 하고는 모의고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으로 문제를 풀어 내려갔다. (역시 사람의 적응력이란)


2교시가 끝나고  점심시간. 나는 친한 친구 2명과 함께 도시락을 까먹으며 남은 시간도 잘 하자 서로를 응원했다. 무슨 반찬이었는지, 어느 교실에 둘러 앉아 밥을 먹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함께 밥을 먹었던 그때 그 기억을 생각할 때면 마음 한 켠 따뜻해져 온다.(그 친구들은 지금도 여전히 내 가장 친한 친구들이다. 오랜만에 연락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어쨌든, 그렇게 잠깐의 행복한  점심시간이 지나 슬슬 잠이 쏟아지는 3교시, 가장 컨디션이 좋았던 4교시를 끝내고. 외국어 영역까지 모든 영역의 시험을 다 치른 나는 발걸음도 가볍게 시험장 교문을 나섰다.



드디어 해방이다! 해방이다?



어떻게 보면 10대의 온 종일을 이 하루를 위해 달려온 것 아닌가. 그렇기에 그 해방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괜히 시험도 잘 본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물론, 느낌이었다.) 친구와 당장 시내로 가서 귀를 뚫었다. 그게 내 어른의 시작임을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같이 부산으로의 여행 계획도 짰다. 신나는 하루였다.



내 계획과 현실의 차이



하지만 가채점을 하고는 한 번의 좌절, 그리고 한 달 후 발표된 수능 성적이 가채점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두 번 좌절했다.  이후에는 내가 가고 싶은 대학을 선택하고 눈치 싸움을 하며 또 한 번의 큰 전쟁이 시작되었다. 내 인생, 수능을 끝으로 끝나는 인생이 아니었던 거다. 가고 싶은 대학은 한참이나 위에 있었고, 내 점수에 맞춰 대학과 학과를 알아보는 일이 그동안 해왔던 공부 만큼 힘들었던 것 같다.

우여곡절 끝에 3개의 대학을 고르고 마지막 날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원서를 썼다. 하지만 2개의 대학 탈락, 1개의 대학은 후보 51번!(빠바바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머리를 울렸다고 한다.) 지금에야 웃으며 얘기할 수 있지만 그땐 정말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점차 대학교의 입학 마감날이 다가오는데도 나에게 연락은 오지 않고, 다른 친구들의 합격 발표에 쓴 웃음 지으며 축하해주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최종 발표 마지막 날 밤. 나는  마음속으로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제발 붙게 해 달라고. 그때, 누군가 내 기도소리를 들은 것처럼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합격 소식이었다. 기적이 일어난 듯, 나는 전화를 받고는 펑펑 울어버렸다. 세상을 향한  첫출발, 그 한 걸음을 떼기가 나에게는 이토록이나 힘겨웠던 것이다.





치열한 전쟁의 결과, 몇몇은 원하는 과에 진학을 하고 또 몇몇은 점수에 맞춰 대학을 진학했으며 결과에 만족하지 못한 친구들은 재수를 했다. 개중에는 수능을 잘 쳤지만 원하는 대학 원하는 과에 들어가지 못했던 친구가 있는가 하면, 수능을 조금 망쳤지만 운 좋게도 원하는 곳에 합격한 친구들도 있었다.

그렇게 함께 걷던 우리의 길은 갈렸고, 각자의 출발선에서 자신만의 속도대로 출발을 했다. 물론 그들이 지금 어떠한 인생을 살고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중 좋지 않은 결과로 슬퍼했던 친구들, 지금 더 잘 살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지나고 보니, 그때 그 날의 결과가 내 인생에 있어서 엄청난 사건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때의 실패가 결코 인생의 실패는 아니었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저 내 발걸음에 맞춰 나의 길을 잘 찾아 묵묵히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느려도 상관없다. 느리게 가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지금도 나는 내 길을 찾아 끊임없이 걷는 중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걸을 땐 누구나 두려운 법이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나는 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여러 번의 좌절을 겪고 있지만(지금도 여전히), 그래도 이렇게 걷다 보면 내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붙잡고.





P.S.
수능. 여기까지 오느라 너무 수고 많았어요. 식상한 얘기로 들리겠지만, 당신이 흘린 땀은 결코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 거예요. 정말로요. 지금까지 잘 걸어왔어요. 앞으로도 아마 넘어지고 쓰러질 때도 있을 거지만,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단련된 그 하나하나의 근육들이 다시 일어서서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줄 거예요. 오늘은 집에 들어오면 먼저 따뜻한 물로 목욕하고, 제일 편안한 자세로 푹 쉬어요. TV를 맘껏 봐도 좋고, 스마트폰 게임도 좋아요. 오늘은 그저 잊고 즐기길. 너무너무 수고 많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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