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이름은빨강 Nov 01. 2021

딸기의 계절이 왔다

딸기 성애자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아이가 피아노 학원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바쁜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돌아왔다. 세탁물을 세탁기에 넣어 돌려두고, 저녁 반찬거리를 밑 손질했다. 아이가 돌아올 시간을 30분 남겨두고 학원 근처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 이번 주 그림책 그림 읽기 조별 프로젝트를 위한 그림책을 빌리러 부랴부랴 움직였다. 도서관 올라가는 길, 과일 가게를 지나치는데 어느새 딸기가 매대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이 보였다.      


‘아직 가을도 다 안 간 것 같은데 벌써 딸기가 나왔네?’ 속으로 중얼거리며 걸음을 재촉해 미리 검색해 둔 책을 빌리고 바삐 내려왔다. 서두른 덕분에 돌아가는 길은 5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과일 가게 앞에 잠시 섰다. 반시와 타이벡 귤 같은 계절 과일들이 판매대를 가득 채우고 그 곁에 수입 청포도도 보였다. 그중에서도 제일 눈에 띄는 좋은 자리를 딸기가 고운 자태를 빛내며 차지하고 있었다.     


알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새빨갛게 잘 익은 딸기를 보자 새콤하고 달콤한 딸기의 맛과 향이 맴도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입에 침이 고였다.

“이거 얼마예요?”

비쌀 걸 알면서 묻는 내 질문에 과일 가게 청년은

“이 만원입니다.”     


“와, 비싸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청년은 곧장 대답했다.

“그렇죠? 그래도 진짜 달아요.”

딱 봐도 맛있어 보였기에 청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잘 봤다고 인사를 건네고 아이를 데리러 다시 학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끔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는 질문을 받는다. 아주 오랜 세월, 그 질문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딸기’라고 말하곤 했다. 요리는 아니지만 딸기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과일이자 음식이다. 새콤하면서도 달콤한, 상큼한 맛, 딸기는 큰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행복함을 가득 안기는 그런 음식이었다. 케이크나 아이스크림에 들어가도 맛있고, 잼으로 졸여도 맛있고, 드라이하고 힘 있는 샴페인에 곁들여도 끝내주는 딸기.

    

하지만 어린 시절, 딸기는 비싸고 귀해서 자주 맛볼 수 없는 과일이었다. 봄에 있는 할아버지 제사상에 오른 딸기 몇 개를 맛보는 게 다였다. 그리고 사춘기가 극에 달했을 때, 뭔 말이라도 할라치면 일단 성질부터 내고 보는 딸과 꼭두새벽부터 다툰 날, 엄마는 늦은 밤 독서실에서 돌아온 나를 위해 그 비싼 딸기를 사놓고 먹기 좋은 상태로 냉장고에 쪽지와 함께 남겨놓고는 했다. 꼬깃꼬깃 접힌 쪽지를 펴면 단정하면서도 부드럽게 마무리된 글씨가 ‘오늘 힘들었지. 딸기 먹고 기분 풀어라.’고 나를 위로하곤 했다.

    

취직을 하고 월급을 받게 되면서 모처럼 약속도 없고 야근도 없어서 일찍 퇴근을 하는 봄날이면 딸기를 손에 들고 들어가고는 했다. 내 입에 들어가는 게 바빠서 엄마가 맛이나 보았는지 살필 여유도 없던 시절을 졸업하고 몇 다라이를 묶음으로 사서는 딸기로 배를 채워보기도 했다. 엄마도 나만큼 딸기를 좋아하시는 게 분명하다는 걸 엄마의 입가에서 퍼지는 미소를 보고서야 비로소 알았다.

     

더군다나 농업기술의 발달로 딸기를 먹을 수 있는 시기가 앞당겨지면서 더 오래 더 맛있는 딸기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딸기는 늘 봄의 한때 잠깐 맛볼 수 있는 귀한 과일인 편에 속했지만 이제 딸기는 겨울이 온 것을 알리는 과일에 더 가까워진 것 같다. 추운 겨울 하우스에서 재배되어 나오는 딸기는 품종개량의 날개옷까지 입고 여전히 비싼 몸값을 자랑하지만 그래서인지 더 달콤하고 향긋해지기까지 했다.  

     

스스로 돈을 벌어 딸기를 사 먹을 수 있게 된 날부터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평생 먹을 딸기는 다 먹은 것 같다. 임신해서는 정말 가격을 따지지 않고 원 없이 딸기를 탐닉했다. 아이를 낳아 키워보면서 엄마의 마음을 짐작이나마 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아이도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딸기를 좋아하는 녀석이었다. 어쩔 수 없이 아니 자연스레 나는 아이에게 내 딸기를 양보하기 시작했다. 그 옛날 엄마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딸기를 좋아하는 마음은 여전했지만 아이가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은 직접 딸기를 맛볼 때의 행복과 또 다른 기쁨이었다. 둘 다 실컷 먹을 수도 있었겠지만 딸기를 원하는 마음은 한 김 식어 미지근하게 바뀌어 버렸다. 딸기에 맺힌 한(?)이 풀린 걸 걸까? 지금도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과일로 서슴없이 딸기를 떠올리지만 예전과 같이 강렬한 탐닉의 욕구는 어느새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 욕구는 탯줄을 타고 아이에게로 옮겨간 것이 분명하다. 나 못지않게 딸기를 사랑하는 아이가 기뻐할 딸기의 계절이 어느새 다가왔다. 이제부터 봄까지 꽤 긴 시간 동안 우리는 딸기 덕분에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한동안은 마트와 과일 가게 앞을 지나갈 때면 딸기를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를 달래느라 곤란할 것이다. 이제 막 나온 딸기의 가격은 선뜻 사 주기엔 사악해서 아이의 끝없는 딸기 식탐을 감당하기 부담되니까.

      

한동안은 가격이 조금 떨어지면 사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판매대 앞을 지나치게 되겠지만 가끔 조르는 아이에게 못 이기는 척 한통을 사들고 와서는 딸기 한 입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표정을 짓는 아이를 보며 또 행복해할 것이다. 점점 추위가 깊어가다가 서서히 해의 길이가 다시 길어지고 새로운 계절이 찾아오면 물릴 만도 하건만 다음 겨울이 찾아오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딸기를 먹어치우는 아이를 위해 나는 딸기 다라이를 손에 들고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겠지. 오래전 나를 위해 딸기를 사 왔던 엄마의 마음이 되어.  

매거진의 이전글 시어머니의 레퍼토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