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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Y Mar 17. 2024

미련한 채움

밤에 갑자기 위통이 찾아왔다. 이유가 뭘까. 오늘 하루 어떤 걸 먹어서 이런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늘도 미련스럽게 먹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오전 11시 30분.

모임을 위해 이른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하자 '아침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라며 사람들이 따라나섰다. 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칼국수 가게에 들러 다 같이 식사를 하고 근처 카페로 이동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배부른 거보다 배고픈 게 일하기에 낫더라.'는 말을 누군가 꺼냈다. 나를 제외하고는 50대, 60대인 사람들인데 다들 동의하는 눈치다.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모든 일은 힘으로 버티는 아닌가. 배고파도 먹고, 배불러도 먹어야 하는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온 나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다.


나는 식당에서 근무한다. 한참 다이어트를 하고 슬금슬금 살이 찌기 시작하다가 식당 일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8kg가 늘었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먹어야만 하는 이유는 다양했다. 끼니를 놓칠까 봐, 맛있는 튀김이 나와서, 졸리니까. 여러 이유로 챙겨 먹는 음식들은 위 속에서 분해되지 않은 채 지방으로 쌓여 갔고, 위통으로 4개월 넘게 고생하면서도 먹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참 미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렇게 채우기만 했을까. 아무도 내게 먹을 것을 강요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를 객관화하여 바라보기 시작했다. 정말 배가 고파서 먹는 걸까. 정말 맛있는 음식이라 먹는 걸까. 이 질문을 하기 전까지. 나는 내가 시도 때도 없이 먹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저 먹어야만 한다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고통을 주기 위한 미련한 채움

나는 언제 폭식을 할까. 매 끼니때마다 폭식에 가깝게 먹고 있지만 통제할 수 없는 폭식은 자학을 할 때다. 2024년을 시작하며 여러 가지로 큰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다. 막연하게 동경하던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깨지면서 많은 실망을 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달콤한 생활을 꿈꿨지만 남보다 못한 사이로 영영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미움이 가득해졌다. 물론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서 무조건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탓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어떤 일이 발생하면 원인을 내게서 찾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존감은 낮아지고, 자신감마저 사라졌다. 그때마다 더 위축되었다. 늦은 밤, 스트레스가 차오르면 배가 고프지 않아도 음식을 찾았다. 그리고 다이어트 보조제를 먹었다. 작년 가을에는 이런 일을 반복하면서 한방 다이어트약 중에 가장 강도가 센 약(다이어트 기간이 끝나며 마지막 처방받았던 약)을 일부러 한 포 먹고 잤다. 그러면 밤새 위가 아파 힘들었고 아침이면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켜야 했다. 한 달분 이상 남은 약을 아까워서 버리지도 못하면서 병원에 왜 이런 약을 처방했냐고 따져 묻지도 못했다. 그들은 내가 식단 조절을 하지 못하는 데에 대한 최선의 처방을 해준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나 나는 또 자책을 했고, 일부러 이 약을 먹으면 위가 아픔에도 불구하고 폭식과 약 복용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더 이상 위를 상하게 할 수 없어 남은 약은 모조리 버렸다. 그럼에도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면 무엇이든 몸 안에. 채워 넣었다. 토스트 빵 중에서도 가장 저렴하지만 양이 많아 냉동실에 얼려둔 빵을 꺼내 굽는다. 한 장을 먹을 때, 딸기잼을 듬뿍 올려 먹으면 혀 끝에 감도는 달콤하고 바삭한 느낌이 좋았다. 한 장까지는 스트레스 해소용이라면 두 장, 세 장이 될 때는 자책용이 되었다. 욱여넣고 또 욱여넣고. 음식의 종류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나를 고통 주기 위해 미련한 채움을 이어갈 뿐이었다.


미련함 채움에 대한 후회

차라리 양질의 맛있는 음식으로 채웠다면 이런 후회는 없었을 것이다. 같은 빵을 먹어라도 최소한 유명 브랜드의 곡물빵이라든가. 혹은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빵집의 유기농 식빵이라도 먹었어야 했다. 그러나 먹는 목적 자체가 고통에 있었으니 음식의 종류, 질은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오늘 모임을 한다고 입고 나온 청치마가 겨울 사이에 작아졌다. 아니, 작아진 게 아니라 휙휙 돌아가던 허리춤의 여유로움이 늘어난 뱃살 때문에 사라졌다. 식사 후에 카페에서 마신 음료는 내가 주문한 라테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캐러멜 마끼아또였다. 이미 그 사람이 내 것을 마시고 있었다. 단 음료가 몸속에 들어오니 칼국수와 만두와 더불어 더욱 배가 빵빵해지고 청치마의 허리춤이 불편해졌다. 꺽꺽 거리며 겨우 소화시키는 약해진 위장을 느낀다. 더 이상 미련한 채움은 없어야겠다.


나보다 20년을 먼저 살아온 사람들이 말한 '배고픈 게 일하기에 낫더라'는 그 말을 나도 적용해 볼 수 있을까.

불혹.

40의 또 다른 말.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는데 나는 그 시작점에서 미련한 채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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