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빈아, 일어나야지. 6시 30분이야!”
부엌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빈은 눈을 반쯤 뜬 채로 이불 안에서 뒹굴었다.
햇빛은 커튼 사이로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스며들었고,
그 빛이 수빈의 얼굴에 닿자 그녀는 눈을 찡그렸다.
아, 또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머릿속엔 오늘 해야 할 일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단어장, 암기노트, 잉글샘 교재…
그리고 학교.
화요일은 유난히 길고 지치는 날이다.
수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불 밖은 차가웠고, 졸음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화장실 거울 앞에 선 수빈은
자기 얼굴을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속으로 말했다.
“오늘도 해내야지.”
머리는 여전히 곱슬이 살아 있었다.
다듬으려 해도 쉽게 말 안 듣는 머리카락.
머리끈으로 질끈 묶어보지만, 잔머리는 삐죽삐죽 나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거실에 나가자 김이 나는 김밥 한 줄이 식탁에 놓여 있었다.
엄마가 도시락도 준비하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은 김치볶음 넣었어. 맵지는 않을 거야.”
“응, 고마워…”
말은 했지만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아침부터 마음이 무거웠다.
화요일이니까.
단어 외운 거 점검 받을 생각,
암기노트 숙제 보여줘야 하는 시간,
새로운 단원에 들어갈 잉글샘 교재.
수빈은 어젯밤에도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단어 중 ‘antarctica’는 외웠지만 ‘uninhabitable’은 아직 헷갈렸다.
그 단어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학교에 도착하면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1교시 종이 울린다.
“안녕~ 수빈아!”
“어, 안녕…”
친구들의 활기찬 목소리가 가끔은 부럽다.
수빈은 억지로 미소를 짓는다.
아무도 모른다.
자신이 아침부터 몇 번이나 “힘들다”를 속으로 삼켰는지.
수업이 시작되자 칠판엔 수학 문제들이 가득했다.
교과서엔 오늘 배울 공식이 적혀 있었지만,
수빈은 문제보다 먼저 속도가 느려진 자신이 걱정되었다.
“선생님, 여기 이 문제 다시 설명해주세요…”
용기 내서 손을 들었지만, 몇몇 친구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 저걸 또 물어보지?’ 같은 느낌.
수빈은 쭈뼛쭈뼛 앉으며 머리를 숙였다.
“내가 너무 느린 걸까?”
점심시간.
급식은 제법 맛있었다.
하지만 수빈은 밥을 한 입 먹을 때마다
‘이따가 영어 교재 들어야지.’
‘암기노트 깜빡 안 했나?’
‘단어 뜻이 뭐였지….’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에 젓가락질이 느려졌다.
친구들은 웃으며 수다를 떨었고,
수빈은 중간중간 맞장구를 치며 껴보려 애썼다.
“오늘 끝나고 뭐해?”
친구 유나가 물었다.
“응… 나 잉글샘…”
“아, 또? 힘들겠다…”
짧게 던진 말이었지만, 수빈은 그 말이 위로처럼 느껴졌다.
학교가 끝나자 수빈은 책가방을 둘러메고
학교 앞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잉글샘 수업이 있는 곳이다.
수업은 30분이지만, 그 안에서 해야 할 일이 많다.
단어장 검사는 기본, 암기노트는 구체적으로 써야 하고,
새로운 단원 교재도 준비되어 있었다.
“수빈이는 단어를 잘 외우니까 100개 정도는 할 수 있지?”
선생님은 웃으며 말했지만, 수빈은 그 말이 칼처럼 느껴졌다.
“100개… 그게 진짜 가능한 걸까?”
수빈은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아… 네…ㅎㅎ…”
집에 돌아오면 이미 해는 저물어 있었다.
엄마는 저녁을 차리고 있었고,
수빈은 숙제부터 꺼냈다.
책상엔 오늘 배운 교과서와 노트,
잉글샘 교재와 단어장,
베플노트와 이어폰이 어질러져 있었다.
수빈은 한숨을 쉬며 단어장부터 펼쳤다.
그 단어들이 이제는 마치 벽처럼 느껴졌다.
밤 10시.
아빠와 영상통화를 하는 시간이다.
아빠는 김포에 계시고, 격주 토요일에만 볼 수 있다.
통화는 영어로 한다.
그것만큼은 수빈에게 있어 ‘행복한 영어’였다.
아빠는 웃으며 말했다.
“How was your day, my girl?”
수빈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It was okay, dad. Just… busy.”
아빠는 스리랑카 사람이셔서 영어를 더 편해하고, 수빈은 그런 아빠가 좋다.
하지만 오늘은,
‘그냥 피곤하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잠들기 전.
수빈은 이불 속에서 조용히 속삭였다.
“나만 이럴까…?”
다른 애들은 학원 3~4개씩도 다닌다는데
나는 왜 이 하나로도 벅차지?
나는 왜 이렇게… 힘들까?
눈물은 나지 않았지만, 마음이 뻐근했다.
숨도 조금 무거웠다.
이게 평범한 하루일까?
아니면, 그냥... 견뎌내야 하는 하루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