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빈이는 원래 영어가 좋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빠와 영어로 대화할 수 있어서 더 좋았던 것 같다.
수빈이의 아빠는 스리랑카 사람이다. 지금은 김포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2주에 한 번, 토요일마다 집에 오신다. 그래서 수빈이는 매일 밤, 엄마 휴대폰을 들고 아빠와 영상 통화를 한다. 아빠는 한국어도 할 줄 알지만, 수빈이와는 영어로 대화하는 걸 더 좋아하신다.
“Hi, Daddy! How was your day?”
“Good! And you? Did you study well today, my little star?”
수빈이는 그런 말이 너무 좋았다. 아빠가 영어로 “my little star”라고 불러줄 때마다, 왠지 진짜 반짝이는 별이 된 것 같았다.
아빠는 수빈이의 발음을 고쳐줄 때도 부드럽게 말해주셨다.
“Not shtudent, my star. Say student.”
“Stu...dent?”
“Perfect!”
그 순간마다, 영어는 재미있는 놀이 같았다.
틀려도 괜찮았고, 몰라도 배우면 그만이었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기쁨, 서로 통한다는 즐거움이 있었다.
학교에서도 영어 수업은 즐거운 편이었다.
요즘은 be동사, 일반동사, 의문문을 배우는 중이었다. 선생님이 “Do you like pizza?”라고 물으면 반 아이들 모두 “Yes! I do!” 하고 외쳐댔다. 수빈이도 그중 하나였다. 영어 시간만큼은 긴장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틀려도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평온한 수빈이의 일상에 ‘잉글샘’이 들어오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처음엔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
“정현 쌤이 너 영어 실력 아깝다고 하시더라. 중학교 가면 단어 외울 것도 많고, 미리 대비해야 하지 않겠니?”
수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와 더 잘 소통하고 싶었고, 잘하고 싶은 마음도 분명 있었다.
또한 정현 쌤은 엄마와 친한 선생님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게 바로 ‘잉글샘’.
태블릿으로 수업을 듣고, 단어장을 외우고, 암기노트를 쓰고, 하루에 다섯 장씩 교재를 풀고, 녹음 과제를 앱으로 제출해야 했다.
처음엔 신기했다. 내 목소리를 녹음해서 AI가 평가해준다는 게 신기했고, 단어 테스트도 게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딱 일주일뿐이었다.
점점 수빈이는 숨이 막혔다.
단어장은 어제 외운 것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데, 매일매일 새로운 단어들이 쏟아졌다.
‘남극의’, ‘얼어붙은’, ‘위협하다’, ‘정체성’... 이게 정말 중학교 1학년 단어 맞을까?
교재는 생각보다 두꺼웠고, 진도는 빨랐으며, 틀린 문제는 따로 정리까지 해야 했다.
화요일이 되면 몸이 굳었다.
월요일 밤이면 자려고 누워도 자꾸 생각났다.
잉선생 수업 시간에 단어를 못 외우면 실망할까 봐, 체크할 때마다 떨려서 손에 땀이 났다.
장난처럼 “안 해오면 양 더 늘려줄거야~”라고 웃으면서 말했지만... 수빈이에겐 장난이 아니었다.
엄마는 말한다.
“다른 애들은 학원도 3개, 4개씩 다녀. 너는 하나뿐이잖아.”
정현쌤은 말한다.
“수빈이는 머리가 좋은데 그만큼 노력도 해야지. 이건 그만둘 문제가 아니야.”
심지어 “중1이면 하루에 단어 100개 외워야 해요.”라는 말까지 들었을 때는...
그냥 웃는 척을 했다.
“아...ㅎ 네...”
웃음 속에 무너진 마음을 숨기기 위해.
수빈이는 문득 궁금해졌다.
처음엔 영어가 진짜 좋았는데,
지금 이게 뭐지...?
영어가 아니라... 그냥 숙제 같았다.
아빠와의 따뜻한 대화는 사라지고,
이제는 ‘단어 시험’과 ‘녹음 평가’가 영어의 전부처럼 느껴졌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들었다.
“다른 애들은 잘해내는데, 왜 나만 힘들까?”
“내가 너무 약한 걸까?”
하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건 그냥... 수빈이만의 방식이 아닐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