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양수 Jan 07. 2018

 평범한 결혼식장이 거기 있는 이유

사랑이란 우리의 약점과 불균형을 바로잡아줄 것 같은 연인의 자질들에 대한 감탄을 의미한다. 사랑은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다. 

-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 알랭드 보통 - 



“우왓! 세상에 이게 다 뭐야?"


여자 친구는 어디서 구했는지 엑셀 파일 뭉치들을 가져왔다. ‘결혼 준비리스트.xls’, ‘d-180.xls’, ‘준비목록_김OO.xls’ 등의 이름을 달고 있는 파일들이었다. 하나의 파일들은 다시 여러 개의 시트로 나눠져 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시트들은 결혼 준비 일정과 세부적인 체크리스트로 구성돼 있고 말이다. 그 사이사이를 깨알처럼 조사한 정보들과 예산/지출 내역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노트북 화면을 보며 감탄한 이유였다.  


“오빠 내 친구가 결혼할 때 조사한 거래. 그리고 인터넷 카페 같은 곳에서도 구했어. 보니까 웨딩 플래너 만나면 이런 걸 주기도 하나 봐” 이런 게 있다면 좋을 것 같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는데. 막상 액셀에 하나하나 표기된 내용 들을 읽고 있자니, 먼저 이 길을 걸어간 선구자들이 새삼 대단해 보인다. 부모님 상견례, 결혼식장 예약, 드레스투어, 청첩장 제작, 이바지 음식 준비, 함 준비 등등!


출처: 작은 결혼 정보센터 


“아니 다들 이렇게 준비하는 거야? 이걸 다? 진짜로?” 

타이트한 타임라인을 보고 있자니 숨이 컥 막히는 게, 보고 있어도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복잡한 암호 같다.  

“형편 되면 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이걸 다 어떻게 해. 그냥 참고만 하는 거지 뭐. 크크.”

“아니 그래도 뭐 이렇게 참고할게 많지. 이거 다 참고하다가는 먼저 탈모가 올 것 같아. 난 대머리로 결혼하고 싶진 않은데 말이야.” 


꼭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낯선 곳이 어떤 곳인지 모를 때는 그곳이 궁금해서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보고 싶은 것들이 생기고 하고 싶은 일들이 나타난다. 결국 그것들을 차곡차곡 챙기다 보면 아무리 봐도 시간이 부족해 보이고, 그러다 현지에선 허둥대기 일쑤였다. 돌이켜 보면 막상 현지의 분위기와 매력을 충분히 누리고 오지 못했다. 어떤 면에서 실패한 여행이었다. 


마찬가지로 결혼 준비에서도 이것저것 모두 챙기다 정신없이 지나고 보면 진짜 중요한 것들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실패한 결혼식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소원을 들어주겠다던 알렉산더 대왕에게, "지금 당신이 햇빛을 가리고 있으니 좀 비켜 주슈"라고 말한 디오게네스처럼. 느긋한 여유와 자기만의 관점이 가장 중요한 것일 텐데. 실은 그런 자기만의 주관과 자기만의 방향성이야말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꼭 필요한 것일 텐데 말이다.


알렉산서 대왕의 호의에 햇빛이나 가리지 말라는일광욕 마니아 '디오게네스'


“오빠 근데 자기만의 관점 이런 거 다 좋은데, 결혼식장은 좀 빨리 예약하는 게 맞는 것 같아. 여기 파일 한번 봐봐. 항상 첫 번째 단계에 나오는 게 상견례랑 결혼 식장이잖아.” 


여자 친구가 멍하게 파일을 보고 있는 내게 말한다. 정신 차리라는 듯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톡톡 두드리며 말이다. 결혼식장 예약하기가 힘들다는 얘기는 친구들을 통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일 년 전에 예약해서 겨우 좋은 시간대를 차지할 수 있었다는 친구도 있었다. “그래 좋아. 우리도 식장부터 알아보자!” 예약을 하기 쉽지 않다는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식장이 예약된다는 점은 앞으로의 여정을 위한 디데이를 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뭔가 디데이가 정해지면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쫀쫀한 긴장감이 있잖아. 푸핫” 


장난스럽게 한 말이었지만, 이 쫀쫀함이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는 타이트한 타임라인으로 바뀌는 건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우린 원하는 결혼식장 리스트를 만들어 일단 전화부터 돌렸다. 우리끼리 아무리 오래 얘기해 봐야 뭔가를 더 알아낼 수는 없는 법. “여보세요? 아네, 거기 대관료나 식대는 어떻게 되나요. 예약 가능 날짜는요?” 그렇게 하루 동안 십 수개의 예식장에 전화 통화를 했으려나. 


“여긴 대관료가 저렴한 대신 밥값이 비싸.” 

“응. 내가 본 데는 밥 값은 싼데 음료가 불포함이네. 필수 옵션도 많고.” 

“아, 여긴 다 좋은데 예약일자가 도저히 안 나온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모두들 비슷비슷해서인지 조건이 맘에 드는 곳은 날짜가 없었다.

예약 가능한 날짜가 있는 곳은 반대로 조건이 별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건, 생각보다 비싼 가격. 


“복작거리며 공장에서 찍어내듯 하는 결혼식은 별로야.” 


나도 동의한다. 우린 가급적 같은 시간에 동시 예식이 열리는 곳은 피하고 싶었다. 비싸고 화려한 곳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특별한 곳이었으면. 그러면서 의미도 있다면 좋을 것 같은데. 뭔가 맘에 드는 곳들은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식사비가 오만원이 넘어가는 것은 기본이고 대관료에 각종 장식을 위한 옵션을 생각하면, 이러니까 빚내서 잔치한다는 말이 나오나 싶다. 사실 까짓것 한 번 무리하면 예약이야 못하겠냐만은 당장에 돈 들어갈 곳들이 줄 서있는 마당에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게 문제였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그동안 결혼식장을 다니며 족히 수십 번은 5만 원을 냈던 거 같은데, 식비 5만 원을 쉽게 넘겨 버리는 예식장도 많다는 걸 이.제.서.야. 알게 됐다. 이런 현실감각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도 결혼 준비가 가진 장점인가. 뭐 그렇지만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며 소화가 잘 안 되는 것도 같다. 아니, 실은 정성과 마음이 중요한 거니까 그냥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자며 여자친구와 크게 한 번 웃었다. 


가난하지만 참 구김살 없이 자란 밝은 커플이다. 






몇 날 며칠 결혼식장 찾기에 몰두하다 보니 문득 학생 때 읽었던 책 한 권이 떠 올랐다. 진중권 교수의 ‘호모 코레아니쿠스’라는 책인데, 거기에 판에 박힌 결혼식을 비판하는 내용이 나온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고딕 건축으로 이뤄진 예식장 그리고 중세 귀족들의 드레스, 판타지적 드라이아이스가 등장하는 것은 키치적이며 미발달 한 미감이라나. 그런 그의 비판에 무릎을 치며 공감했던 것 같다. 조목조목 틀린 말이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그때부터였나. 그렇게 키치적인 결혼식은 절대 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을 했던 게 말이다.  


기술복제시대에는 과거의 명품 결혼식을 시뮬레이션한다. 연미복과 드레스를 입고 왕자와 공주를 연출하는 것은 서구 중세 궁정의 시뮬레이션이다. 그나마 오늘날의 결혼식은 수공의 단계를 넘어 대량으로 찍어내는 기계적 복제가 되었다. “곧 다음 결혼식이 시작될 예정이오니, 빨리 기념 촬영을 마쳐주시기 바랍니다.” 자본의 회전율을 높이기 위해 시뮬라크르의 자전을 재촉하는 이 멘트는 방금 안개까지 동원해 연출한 예식의 ‘아우라’가 실은 대량 복제되는 상품 임을 일깨워준다. 

-호모 코레아니쿠스 / 진중권 - 



그런데 이제 와서 주변을 보니 왜들 그렇게 판에 박힌 결혼식을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교통 여건도 나쁘지 않고, 식사도 나쁘지 않고, 확 끌리는 곳은 아니지만 이것도 무난 저것도 무난. 그냥 무난 무난 종합선물세트로 나쁘지 않은 곳이니 말이다. 판에 박힌 예식장은 싫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규격화된 곳에서 가장 합리성을 찾을 수 있는 건 현실이 알려주는 또 다른 진실이다.

 


“아, 정말 시골 교회에서 몰래 결혼하고 싶다. 가족들이랑 친한 친구들만 초대 해 놓고 말이야. 하하.” 

"오빠 무슨 말이야. 시골 교회에서 하려면 적어도 교통을 우리가 준비해야지. 그리고 또 식사는 어째. 어휴"


답답한 마음에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이마저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처음이라 서툰 우리의 결혼 준비 때문인지. 냉정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 때문인지 괜스레 여자친구에게 미안해진다. 스몰, 셀프, 의미. 이 세 가지의 보물섬을 향해가는 우리의 모험이 시작부터 거센 풍랑을 만난 걸까. 


서울시내에 흔해 빠진 결혼식장의 수만큼 고민의 수는 더 늘어나는 것 같다. 


이상을 향해 달려가는 모험심과 현실과의 균형감각 사이에서 

뭔가 깜짝 놀랄 만한 우리만의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오늘 조사한 자료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보지만, 고민은 더 깊어지는 이유였다. 



결혼은 소박하게 하는 게 대세


소박한 결혼식은 소박한 비용으로 만들어 지기 어렵다는 게 함정







안녕하세요~ 지금 읽고 계시는 '위클리 매거진'이  
아래와 같이 예쁜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연재한 글 중 일부는 불가피하게 비공개 처리를 했습니다. 


책 내용에 관심이 가시는 분들께서는 

아래 링크를 통해 더 많은 정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계신 분부터  

결혼이 고민이신 분에게 

결혼 말고 그저 사랑만 하고 싶으신 분부터 

결혼보다 소중한 것들을 찾고 계신 분들에게 


여기 이런 결혼 이야기도 있다는 걸 얘기해 보고 싶었습니다.


결혼이 부담으로 다가가기보다는 두근거리는 인생 이벤트가 되길 기대하며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준비하는 나만의 축제가 되길 바라며


자신 있게 추천드립니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