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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양수 Dec 31. 2017

그래서, 우리 결혼할까?

말에는 생각을 규정하는 힘이 있다

한번 달리기 시작한 자전거가 움직이는 동안은 안전하지만 움직이지 않고 멈추게 되면 이내 넘어지고 만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도 일단 시작되면 그 후에는 발전만 있어야 한다. 어제에 비해 오늘 조금의 발전도 없다면 이미 끝나버린 것과 마찬가지다.
 - 솔제니친 / 암병동 중 -


“근데 말이야. 너희들 결혼은 안 할 거야?”

 

그러니까 친구 지노의 생일 모임이 막 무르익던 시간이었다. 어두운 바에선 비트가 강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서로가 잘 아는 커플 모임이었고, 예닐곱 명이 모여 서로 질세라 왁자지껄 떠들고 있던 중이었다. 서로의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엉켜 사실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그런 시간. 그렇게 산만한 시공간이 일시에 썰렁해지는 순간이 있었으니, 바로 저 질문. 현우의 마법 같은 질문 때문이었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해?”

 

이 질문을 한 현우로 말할 것 같으면 자기감정에 참으로 솔직한 프로 연애러.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명확한 행동파라고나 할까. 양가 집안의 반대와 여러 난관이 있었지만 코뿔소처럼 돌진해 결국은 결혼에 성공한 진짜 사랑꾼이다. “난 말이야. 지금 아내 아니면 평생 결혼 안 하려고 했잖아. 아니 확 죽어버리려고 했다니까.” 보헤미안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데 그래서 잘 나가던 직장도 쿨하게 그만두는 사람인데 참으로 의외였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올인한 것도 의외였으며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밀어붙이는 것도 의외였다. 


나로선 자기감정에 그렇게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그가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운 마음이 한가득 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도 내 감정에 확신을 못 갖는 건 아니다. 내가 내 여자친구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명확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러 가지 생각이 혼란스럽게 떠오를 때면 나도 내 생각의 갈피를 못 잡겠으니 문제다.


이를 테면 그녀를 정말로 사랑하지만 지금 결혼 얘기를 꺼내는 게 맞는 건지. 결혼은 현실이라던데 현실적으로 내가 결혼할 준비가 된 건지. 경제적 자립을 위해 분명 엄청나게 많은 돈이 필요할 텐데 그 모든 게 가당키나 한 건지. 내가 하고 있는 사랑이 수많은 사람이 하고 갔다는 영혼의 단짝을 확신하는 사랑이 진짜 맞는 건지. 

인류 역사상 로맨틱한 연애의 탄생은 불과 몇백 년 전 이야기라고 하던데, 울렁이는 연애 감정에 너무 취한 건 아닌지. 그렇게 경제적, 심리적, 사회적으로 독립해 완전히 제도적으로 인정받을 준비가 된 건지. 심지어 나는 잠고대도 심하고 코도 고는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나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정신이 멍 해질 때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단어와 문장이 궁색 해 질 따름이었다. 


“응? 갑자기 결혼은 왜?” 


마음과 다른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사실 이런 대답을 하려는 게 아닌데. 왁자지껄 하던 분위기는 순간 찬물을 한 바가지 뿌린 듯 고요해진다. 친구들은 일제히 나와 여자친구를 쳐다본다. 쿵쿵 울리는 음악소리가 나의 비겁함을 힐난하는 걸까. “아 뭐. 해야지! 결혼. 하하하.” 어색한 내 대답이 음악소리에 묻힌다. 예전에 우리가 학생이었을 적, 언젠가 현우한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넌 어떻게 그렇게 매번 영혼을 내던지는 사랑을 해." 잠시 하늘을 쳐다보던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매번 진심이야.” 


사뭇 결연한 표정으로 답하는 그를 보고 참으로 멋지다고 생각했다. 자기 확신에 찬 행동파에게서 나오는 당당함 이라고나 할까. 그에게 반해 이마에 키스라도 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고민하기보다는 행동한다던 그의 말마따나 그는 매번 진심이었고 매번 열정적이었으며 매번 화끈하게 상처받았다. 반면 나는 매번 뭐가 그렇게 두려웠는지 행동으로 한 발을 내 딛기가 힘이 들었다. 조심조심 그리고 상처받지 않게. 그러다가 수가 틀리면 그래도 이번 연애는 내가 손해 본 건 아니라며 안도했던 걸까. 내가 그럴 때마다 현우는 비겁한 변명 이라며 나를 비난했다. 전쟁에 패배한 장수를 참 하듯 내 잔에 그득하게 술을 부으며 말이다. 


기억은 지워도 사랑은 지울수 없다는 진짜 사랑꾼들의 영화 '이터널 선샤인'


여자친구와 부부로서 앞으로를 보낸다니. 구체적으로 그려보지 않은 미래의 모습들이 슝슝 지나간다. 어쩐지 웃음이 삐져나온다. 그보다 여자친구와는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던 결혼 문제였는데. 입으로 꺼내니 민망하면서도 한편으로 알 수 없는 새로운 감정이 솟아난다. 


“그러니까 난 말이야. 사실 결혼에 대해서 아주 구체적인 생각을 해보진 않았어. 그래도 내가 확신하는 건 하나 있어!” 


그건 바로 여자친구랑 같이 있으면 너무 재밌고 신나서 할 얘기가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밤새도록 전화를 했는데 끊고 나서 보니 할 얘기가 더 남아서 카톡을 또 보내는 정도라고나 할까. 그래서 결혼은 몰라도 이 사람이랑 오래도록 만난다면 확실히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결혼이라는 단어로 등가 교환될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지금 결혼이 하고 싶은 게 맞는 것 같다. 친구들은 ‘결혼’이라는 말의 무게를 실감 듯. 모두들 이 시끄러운 공간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얘기를 들어줬다. 


“그래. 니가 무슨 특권층도 아니고. 우리만 결혼할 수는 없지 않냐. 너도 얼른 결혼해서 평생 우리랑 같이 괴로워해야지. 크크크.” 

“응 일리가 있는 말이네.” 

현우의 말에 지노가 과도한 진지함을 뽐내며 반응한다. 친구들은 그게 재밌어 죽겠다는 듯 키득거리며 30년 산 부부 같은 아재 드립을 쳐 댔다.  


말은 생각을 규정하는 힘이 있다. 어쨌든 정리 안 된 서랍 같은 의식 속에서 결혼이라는 단어를 끌어올린 것은 순전히 예상치 못했던 상황 덕분이었다. 그렇지만 일단 세상으로 나온 말은 빠르게 생각을 규정해 나갔다. 한편으로 부담과도 같은 말이었다. 그래서 여자친구와 단 둘이서는 한 번도 꺼내보지 않은 금기어였고. 그렇지만 막상 입으로 나오자 오히려 정리가 안되던 생각이 조금씩 방향을 잡아가는 것 같다. 그리고 어쩐지 결혼이 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고 말이다.  


“오빠! 뭐해. 파란불이야.” 


모임이 끝나고 여자친구를 집으로 데려다주는 길. 신호가 바뀐 줄도 모르고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너는 어때?” “응? 뭐가?” “결혼 말이야.” 자연스럽게 여자친구의 생각도 들었다. “아 나 진짜 나이 때문인가. 나는 결혼 안 해도 되는데 사람들이 언제 할 거냐고 자꾸 물어보네. 하하.”


여자친구는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녀만의 긍정을 표하는 방식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정 원한다면 까짓것 한번 해주겠다며, 호탕하게 말하는 것도 그녀는 잊지 않았다. “아, 어, 음. 그럼 말이야. 우리 내일 좀 알아볼까?” “뭘?” “음. 뭐 결혼하려면 뭐가 필요한지 뭐 그런 거 말이야. 하하.” 피식 웃으며 돌아가는 여자친구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어쩐지 그녀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특별해 보였다면, 그 또한 말이 갖는 힘 때문이었을까. 


내일 벌어질 일은 상상도 못 한 채 오늘은 마냥 둥실둥실 떠있는 기분을 누릴 시간이었다.


손만 잡고 잘 준비하는 해달 (출처: 비주얼다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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