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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점휴업 Oct 03. 2023

굳이 또? 제품쟁이 병이다 그거

: 서비스 기획자랑 백엔드 개발자가 결혼하면 모첩을 굳이 또 만들어요

나야 모바일 청첩장을 직접 만들 수는 없기 때문에 짝꿍에게 혹시나 만들어 보고 싶은지 물어봤는데 짝꿍은 반쯤은 당연하게 본인이 한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래서 작업 착수로부터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 모바일 청첩장을 완성했다. 으레 모바일 청첩장의 기능처럼 정보 전달과 이미지 갤러리가 있고 추가적으로 짝꿍의 업을 살려 가벼운 게임도 붙여 만들었다. 총 작업시간이 한 달이 소요된 건 아니고 회사 + 결혼준비 + 이직과 함께 병행해서 시간이 조금 더 오래 걸린 것도 있는 듯하다. 결혼에서 어쩌다 보니 가장 공들인 게 모바일 청첩장이라니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미리 작성해 보는 후기.


주의!!! 이 글은 모바일 청첩장을 직접 제작하는 팁을 제공하는 글이 아니라 가능하면 그런 결정을 하지 않도록 말리고 싶..은.. 개인적인 회고 글이다


모바일 청첩장은 종이 청첩장을 찍었다면 업체에서 무료 또는 1만 원으로 제작해 주는 데다가 몇만원 더 얹으면 영구도메인까지 준다. 잔인하게 말해서 정말 의미 부여할 것 아니라면 시간 전혀 들이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나는 짝꿍이 제작할 생각이 없었다면 노션으로 만들건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기능을 써서 만들건 하려던 계획이었다. 모바일 청첩장을 계기로 짝꿍이 간만에 사이드 프로젝트도 할 겸 신규 프레임워크 공부까지 해보겠다고 하니 (짝꿍은 백엔드 개발을 주로 하는 사람이라 프론트엔드 공부를 심지어 따로 해서 구현했다) 말리기가 어려웠다. 결과적으로는 좋은 추억이고 덕분에 짝꿍에 대해서 더 알게 되었지만 추천이냐고 단적으로 묻는다면 무릎반사처럼 아니올시다!


결혼식 준비 자체에 별로 할 일이 없는 우리처럼 전통혼례를 하는 케이스라면 시간이 나서 고민해 볼 수도 있고 종이청첩장도 가족이 그린 그림과 가족이 인쇄하는 무언가 모든 가족의 추억이라 모바일 청첩장도 그 연장선이라 고민해 보게 된 것도 있다. 스냅사진마저도 친구들이 찍어줬기 때문에 '없는 살림에 십시일반 깔깔대며 산다' 정도의 추억을 간직하고 싶어서 난 흔쾌히 도전한 것뿐 다시 한번 말하지만 추천하지 않는다.


짝꿍의 업무 자아를 훔쳐보며 이 사람에 대해서 더 알게 되는 기회이다


짝꿍과 만난지는 10여 년이 지났지만 일을 같이 하지는 않았다. 백엔드 개발자인 짝꿍은 '기획자가 꼭 있어야 해?'부터 시작해서  '기획자가 사실 가장 오래 살아남을 수도. 가장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닐까?'까지 오는 데에 그만치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프로덕트 매니저로서의 직업 자아가 무척 큰 나와 굳이 불필요한 충돌을 하기 싫은 점도 있었다. 인턴을 하면서 만났기 때문에 짝꿍은 내가 인생 처음으로 써본 화면기획서를 본 사람이지만 지금 만드는 제품의 복잡도까지 오기의 과정을 모른다. 반대로 나도 이 사람이 그간 어떤 커리어패스를 걷고 업무적 상황에서의 관계 맺음의 어려움은 알지만 구체적으로 업무 고민은 들어줄 수 없어서 잘 몰랐다. 게임을 구현 사람과 금융을 기획하는 사람이 같이 일하는 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어렵겠다 싶다.


금융에 정답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택지가 많지는 않다. 비즈니스 로직 층위에서는 이미 다양한 규제로 정해진 방식이 있고 보수적인 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 프로덕트 매니저로서 그런 서비스 계통을 골라왔고 나는 복잡도가 높은 서비스를 완성하고 운영하는 데에 특화된 사람이라 창의력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한다. 반대로 게임은 생각보다 정교한 고민을 하는 동시에 재미란 무엇인지에 대해서까지 생각해야 하는 도메인 같다(나랑 안 맞다). 귀찮음과 재미의 한 장 차이를 그리고 미세한 표현으로 훨씬 완성도가 높아 보이는 걸 작업하는 동안 옆에서 보면서 정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사고의 출발 자체가 그래서 다른데, 나는 '이걸 언제까지 만들어서 어떤 사람들 몇 명 정도 쓰게 해야겠어'로 시작하고 짝꿍은 '이런 개념을 사용한 게임을 만들거고 어떤 느낌이 났으면 좋겠어'로 시작해서 그 간극을 좁히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정보성 웹페이지를 만들 때도 다르지 않은데 나는 '언제까지만 만들면 최대한 많이 뿌리면 그만, 공수는 최소화 그 시간에 다른 거 해'였고 짝꿍은 '새로 배운 것을 써서 만들고 다크모드 지원, 어른들이 많이 보니까 폰트 크게'였는지라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기획자는 이래 그리고 개발자는 이래 같은 방식으로 이걸 접근하고 싶지는 않다. 도메인을 원체 다르게 골랐고 일하는 환경도 다른 데다가 성격도 다르니까 말이다. 오히려 한 발짝 물러서서 내가 아는 짝꿍이 이렇게 일하겠거니 했던 편견을 많이 깨서 좋았다. 나는 싫은 게 같은 사람은 평생 갈 수 있다 생각하는 편인데 다시금 우리가 싫어하는 것 중 공통되는 게 꽤 있는 걸 확인해서 그것도 좋았다.


어차피 우리 밖에 모를 추억이다


모바일 청첩장을 가족들에게 돌렸을 때 당장 처음 받았던 연락이 사진 확대가 안 된다는 제보였다. 짝꿍에게 그 기능을 강조했지만 개인취향상 빠졌는데 역시나 어른 유저를 기준으로 생각할 때 얼굴 확대만큼 중요한 게 없다. 부랴부랴 구현을 붙이고 계좌번호 복사 기능이 특정 안드로이드 환경에서 안 되는 걸 확인하고 짝꿍이 일단 재현하는 것부터 고생했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지만 결국 이 페이지는 다들 최대 2번, 받자마자 1번 그리고 식 전날 위치와 시간 깜빡해서 또 1번이 최대로 많이 볼 페이지이다. 그래서 1만원짜리겠거니 생각도 든다.


웹페이지 한 장만 결과물을 봐도 어느 정도는 만든 사람의 취향이나 성격도 나온다고 생각한다. 회사 일이라면 문서 한 장만 봐도 추정이 가능한 첫 번째 편견 정도는 생기니까. 우리가 만든 모바일 청첩장이 너무 웃기게도 어설프게 촌스러운데 복작복작하니 우리스럽게 나온 게 가장 만족스럽다. 이 제품에는 그런 기능이 없지만 어찌 되었건 앞으로의 파트너로서 우리가 어떤 색깔인지 그리고 그 색깔을 맞춰가는 과정을 우리는 안다고 생각하니 조금 뿌듯했다. 그리고 어찌 될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여기 붙여서 출시한 게임이 대박이 날지도! 워들도 프러포즈용 게임이었다가 NYT에서 산 걸 생각하면서 만들었는데 (김칫국이 가풍이다) 뭐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식이 한 달도 채 안 남았는데 모첩 회고 혼자 하고 있다니 이 병은 앞으로도 못 고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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