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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 Feb 04. 2020

리뷰) 디 어페어

운 좋게 살아남은 자들을 위하여... (시즌4 스포 있음)

앨리슨이 죽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주인공 중 하나인, 어쩌면 이 극이 시작된 이유이기도 한 인물이 한 시즌을 남겨놓고 죽어버리다니.


그래서 이 극은 현실과 닮았다. 정해지지 않은,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 없는 결말. 그래서 왜냐고 따져 물어봐도 소용이 없는 이율배반적인 삶, 인간 그리고 진실. 인생에서 '왜 그런 일이...'에 대한 해답이 없는 것은 우리가 나 자신이 왜 이렇게 생겨 먹었는지 모르는 데에서 출발한다.


극에서 노아의 대학 동창이 진행한 소규모 수업 주제는 이와 같은 현상을 좀더 고상하게 표현한다. '나는 나와 모순된다.' 모순되는 개인이 모여 관계를 이루고 이 모순은 더욱 거대한 모순덩어리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인생이라고 부른다.


앨리슨의 죽음에는 한 남자가 있다. 시즌4까지 드러난 화면상의 진실은 그 남자는 위험한 PTSD환자였고 심리상담을 공부하던 앨리슨은 그와 같은 사람들을 가까이 하면서도 정작 그들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 자기 스스로가 환자이며, 아직도 부족하고 모자라서 자꾸 쉬워보이는 여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기객관화를 하지 못하면 상처는 자꾸만 덧나 어느 순간엔 스스로를 잡아먹어 버린다.


앨리슨은 어려운 조건 속에 살았지만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리며 간호사라는 전문성있는 직업도 가지고 있었다. 젊고 아름다웠고 주변엔 그를 좋아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인생은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고 성실과 진심을 다하더라도 삶의 비극은 벌어진다.


앨리슨은 첫 아이인 가브리엘을 사고로 잃게 되고, 이 비극으로 스스로 무너져 버린다. 앨리슨은 남편인 콜을 믿지 못하고 원망했으며 밀쳐내려 심지어 불륜까지 저지르지만, 이 모든 과정은 콜의 사랑 콜과의 행복 콜과의 추억에서 필사적으로 벗어나려는 앨리슨의 비겁함이었다. 스스로에게 벌을 주고 불행한 사람이 되어야만 마치 편안함을 누릴 것처럼, 앨리슨은 비극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려간다.


앨리슨의 절망적인 상황 속으로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남자가 노아이며, 노아를 통해 이어지는 헬렌의 삶 역시 앨리슨과 콜 못지 않게 상처투성이다. 네 남녀의 얽히고 얽힌 불륜 관계는 겉표면의 이야기일뿐, 극은 이들 삶으로 매우 깊숙이 들어간다. 이들의 현 가족 뿐아니라 부모와 형제 관계까지 더듬으며 극은 네 남녀에게 뿌려진 비극의 씨앗이 꽤 오랜 기간 싹을 틔우고 무럭무럭 자라왔음을 보여준다. 그 수풀 속에서 네 명이 처참한 몰골로 헤집고 나오는 과정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드라마다.


성인들의 이야기가 맞다 싶게 선정적이지만, 이들이 과연 성인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엉망진창, 원어 그대로 mess 같은 상황으로 가득차 있다. 한때 한국에도 막장드라마라는 장르가 판을 친 적이 있는 것처럼, 이 웰메이드 드라마 역시 막장드라마와 하나 다를 것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마디로 이들의 인생은 모두 망가지고, 부모로서의 책임과 의무 또한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버린다. 그로 인해 잘못 없는 아이들은 상처받고 이들 각자에게 새로운 사람들이 또 끼어들어 크고 작은 사랑과 슬픔의 관계들이 모였다 헤쳐지는 과정을 밟는다.


이 극이 인생의 모순과 부조리를 그대로 닮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엉망진창의 상황 속에서, 인물들이 어떻게든 살아내려 애쓰는 모습 때문이다. 콜은 불의의 뺑소니 사고로 동생이 죽고, 노아는 전처의 잘못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간다. 헬렌은 중독으로 사랑하는 자식들을 내동댕이친다.  하지만 이들은 또다른 누구가를 만나고 몸 속 깊숙한 어떤 상처와 슬픔을 꺼내어 그들의 마음과 연결짓고 싶어한다. 모두가 각자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현실에서의 삶도 그와 같다. 모두들, 애쓴다, 어떻게든.


이들의 효과적인지는 잘 모를, 그러나 필사적인 살아내려는 노력과 상관없이 시간은 계속 흐른다. 인생 삽질이 계속되는 동안 차곡차곡 쌓인 시간은 어느덧, 스스로 단 하나뿐인 결말을 내놓는다. 죽음. 자신이 진정 누굴 사랑하는지 깨달을 즈음, 사랑하는 이는 영영 사라져버리거나 죽음을 앞두고 있다.


콜은 앨리슨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된다. 마지막까지 그녀를 알지 못하는 이들로 가득한, 그 우스꽝스럽고 비극적인 장례식장에서 콜은 앨리슨의 유해를 잡고 미친듯이 뛴다. 오직 그녀를 진정 사랑했던 콜만이 앨리슨의 마음을 읽는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콜은 앨리슨의 유해를 죽은 첫 아들 가브리엘의 무덤에 데리고 간다. 그곳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꿈을 꾼다. 살아서 따뜻한 그녀의 몸을 붙잡고 있는 꿈을. 사랑하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 그것은 당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며, 당신에게 주고 싶은 것들이다. 당신 자신도 때로는 알지 못하는 당신의 마음까지도, 사랑하는 이의 눈에는 훤히 보일 때가 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마법이며, 진실이다.


진정한 나 자신으로 살아보지 못한 콜과 앨리슨. 내가 원하는 것을 끝끝내 말하지 못한 채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둘의 관계는 허무하게 종료돼 버린다. 콜은 너무 늦어버린 스스로의 미련함에 다시 또 무릎 꿇고, 할 수 있는 거라곤 남아 있는 둘의 딸 조애니를 데리고 어딘가로 떠나는 결심 뿐이다.


암에 걸려 죽어가는 남자친구 빅을 보며, 헬렌은 차마 마지막을 지킬 자신이 없다. 노아와의 오랜 결혼생활에서 일군 것들을 결코 놓을 수 없었던 헬렌은 상처를 잊고자 흘러가는 대로 그를 만나왔을 뿐이다. 그를 곁에 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였을 뿐이다. 그의 마지막 남은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게 했다는 생각으로 헬렌은 괴로워한다. 노아는 말한다. 죽어가는 빅의 마지막 길에 안전하며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줄 사람은 바로 헬렌 뿐임을. 그것이 헬렌의 역할이며, 그것 또한 빅에 대한 그녀의 사랑임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남의 인생에 참견하는 것이 참 쉬운 노아. 정작 앨리슨을 콜과의 관계 속에서 끌어내고 앨리슨을 하나의 뮤즈로 만들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인생 역전한 것처럼 보였던 노아는 가장 자기 기만이 심한 인물이다. 헬렌에 대한 미안함으로 대신 감옥에도 다녀오고 잃어버린 자식들과의 관계도 뒤늦게 회복해보려 하지만, 정작 자신 때문에 도구로 전락해버린 앨리슨의 비극에는 태만하고 무관심하다.


자신의 인생을 재건하려는 듯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자신의 인생이 어디에 와있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시즌4가 마무리된다. 그래서 그는 앨리슨의 죽음에 끝끝내 방관자로 머무른다. 그녀가 왜 죽었는지, 무엇을 필요로 했으며, 어디로 나아가고 있었는지 그는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노아는 불륜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키는 인물이다. 누군가에게 사정없이 끌릴 때에, 멈추어 생각해야 한다. 정말 나의 눈이 그(혹은 그녀)에게 가있는지, 나 자신을 향한 값싼 나르시시즘이며 자기 연민은 아닌 것인지.


그럼에도 노아는 작가답게 명언을 남기며, 시즌4를 종료했다. 살아남은 우리들은 그의 말대로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말은 백번이고 천번이고 맞다.


/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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