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떻게 해서든 너 고소할 거야.

by 연남동 심리카페


민감한 특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불우한 환경에 좀 더 취약하지만, 안정적인 환경에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장점을 누릴 수 있다. 민감한 사람들은 감정이 풍부하다. 좋은 일이 있으면 더 행복해하고 나쁜 일이 있으면 더 좌절한다. (생략) 감정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만들고, 같은 상황이 다시 생기면 그 지식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준다. (생략) 정보를 보다 세심하게 처리하는 사람일수록 감정이 풍부하다.

- 일레인 아론, <타인보다 더 민감한 사람> 중에서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비슷한 상황이 다시 생기게 되었을 때 그때의 경험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회피하거나 미화시킴으로써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는 둔하게 만든다. 대신 관계와 안정감에 대한 결핍에 따른 욕구는 강하기 때문에 타인의 기분과 감정, 반응에 민감하게 의식하고 반응해버리는 것이 몸에 배어버리는 것이다.


X의 그녀가 몇 년 전에 남겼던 고민도, 어제 와서 보여주고 들려준 모습도 그러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왔다는 말도, 도와달라는 말도 안쓰럽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X의 그녀에 대한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은 J를 만나고 더 크게 느껴졌다.






우리 엄마 좀 도와주세요.



더는 속상해서 못 보겠어요. 우리 엄마가 너무 불쌍해요.


며칠 전에 친구들과 와서 상담을 받았던 J가 이렇게 말했다. J는 5살 차이가 나는 남동생이 있는 장녀인 여자분이셨는데 어머님과의 관계가 애틋했었다. 친구들과 왔었기 때문에 속 얘기들을 하지 못했었다며 다시 혼자 예약해서 왔었다. 그리고 꺼낸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였다. 친구들과 왔었을 때 첫째로써의 삶이 어땠었는지 물었던 말에 자신의 어린 시절이 어땠을지를 얘기해줬던 것이 떠올랐다.


그냥 전형적인 장녀로 살았던 거 같아요.
J님이 말하는 전형적인 장녀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지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요?
동생한테 양보하고, 엄마 아빠 말 잘 듣고, 말썽 부리지 않고, 항상 모든지 열심히 하고, 동생한테 모범이 되고, 하기 싫다고 안 하는 거요.


나는 J의 말에서 첫째로써 얼마나 답답했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생활하는 것이 답답하고 힘들지 안았었는지 물었었고, J는 이렇게 말을 해주었다.


그런 마음이 컸었죠. 그래서 한 1년 집에서 나와서 자취를 했었는데 전 그게 더 힘들더라고요.
어떤 점이 힘들었나요?
죄책감이요. 엄마 혼자 집에 두고 저만 도망쳐 나온 것이 너무 불편하고 힘들었어요. 분명 엄마는 집에서 아버지 때문에 힘들 텐데, 아버지로부터 지켜주고 보호해줄 사람 없이 혼자 참고 있는 모습이 자꾸 떠올라 마음이 힘들었어요. 저는 그냥 엄마가 있는 집에서 사는 게 좋을 거 같더라고요. 어머님도 그러기를 바라는 모습이셨고요.


좋아서 좋다라기보다 좋은 것으로 하는 것이 좋을 거 같아서라는 말이 안쓰러워 보였다. 그랬던 J가 더는 속상해서 못 보겠다고 엄마를 좀 도와달라고 했다. 아버님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속상한 일을 겪게 되는 상황이 점점 심해져간다는 것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마치 그런 엄마의 보호자이자 아빠와 있었던 일들에 대한 하소연을 들어주는 친구로서 생활을 해왔다고 했다.


엄마를 도와달라는 말도 양가감정이 담겨 있었다. 말 그대로 엄마가 아빠로부터 무시당하고 속상한 일을 겪지 않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이제 그만 그런 엄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두 가지를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엄마도 다 아신데요. 그런데 자기는 경제적인 결핍과 불안함을 가지며 살지 않을 수만 있으면 다른 건 어떻든 견딜 수 있으시데요. 빚이나 생활비 등으로 스트레스받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먹고사는 데에 불안요소가 생겨지게 되는 것보다는 지금의 이 상태면 얼마든지 살 수 있다면서요. 그런데 그러면서 아빠가 자신에게 했던 말, 행동, 그런 것을 하나하나 다 저에게 꺼내놓으세요. 이젠 불쌍해서 그런 말 저에게 하지 말라는 말도 못 하겠어요. 저한테 얼마나 의지하고 의존하는지 잘 아니까요.


J 씨, 어머님만 J 씨에게 의지하고 의존하고 있을까요?
네?
J씨도 어머님에게 의지하고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데요. 그림검사 그림을 그려주신 것들에서도 그렇고 J 씨는 강하지 못한데 관심과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J 씨의 다른 욕구들은 모두 억누르고 있는 모습이거든요.


J는 가만히 나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J 씨는 J 씨의 일상에 너무 없으시잖아요. 그런데 어머님에게 존재감 있는 존재로 있는 것에 얽매여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일일 것 같아요. 너무 어린 나이부터 어른 아이로 생활했어야 했으니까요. 심리정서적인 안정감이 충족이 되지 않는 상황과 환경에서는 계속 반복되지 않을까요?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요... 그렇다고 엄마를 외면할 수는 없잖아요.
외면이 아닌, 엄마에게 J 씨가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어머님도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선택을 할 수 있게 알려주는 것으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무엇보다 어머님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 아닐까요? J 씨가 계속 보호자 역할, 중재자 역할, 다리 역할을 해주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을까요?


J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이렇게 물었다.


제가 엄마만 따로 예약해서 엄마만 여기에서 상담을 받으면 도움이 될까요?
제 생각은 크게 도움은 되지 않을 거 같은데요. 스스로가 원해서 온 것이 아니다 보니까요. 대신 여기에서의 시간을 많이 들려주세요. 연남동인 데다가 심리카페라는 것이 부담감이 크지는 않으실 거예요. 여긴 워낙 다양한 분들이 오세요. 중학생에서부터 50~60대인 분까지 연령이 다양하시거든요. J 씨가 친구들과 예약해서 함께 와서 받듯, J 씨의 어머님 나이의 분들도 친구분들과 함께 와서 받는 경우들도 꽤 있어요. 재밌는 건, 둘의 모습이 비슷하다는 거예요.
둘의 모습이요?
네, 20대 분들이 친구들과 와서 여기에서 받는 모습이나 50대 분들이 친구들과 와서 여기에서 받는 모습이 비슷해요. 여고 동창생 같은 모습들이거든요. 친구들과 있으면 엄마라는 타이틀이 아닌 모습으로 있게 되어서 더 그런 것 같아요.
그러면요, 엄마도 여기 와보겠다고 하면, 엄마만 받고 전 그냥 옆에 있어도 되나요?
그럼요, 어머님도 한번 와보고 싶으시다고 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요. 어머님과 따님이 함께 오시는 경우들도 많은 걸요.


J의 어머님이 먹고사는 것만 경제적으로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다면, 기분과 감정이라는 건 그때그때 좀 추스르면서 살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습이 X의 그녀 모습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J가 어머니와의 관계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보는 자신의 모습에 더 신경 쓰고 의식하며 생활하는 모습 또한 X의 그녀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부디 J의 어머님과 같은 선택은 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전화


J와의 상담을 마치고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이름이 등록되어 있지 않은 처음 보는 번호였다. 보통 예약 문의 전화들인 경우들이 많아서 웬만하면 전화를 받으려고 하는지라 상담을 마친 자리에 앉아 전화를 받았다. 부드러운 목소리의 남자였다.



"연남동 심리카페 사장님 맞으신가요?"



나는 맞다고 대답하고 어떤 일로 전화를 하신 건지를 여쭈었다. 사람의 목소리가 이렇게 짧은 순간에 전혀 다르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날 처음 보았다.


며칠 전에 커플로 상담받았던 사람인데 지금 당신 때문에 결혼 파투 나게 됐어! 어떻게 책임질 거야? 내가 너 고소할 거야. 어떻게 해서든 너 내가 법정에 세우고 만다. 두고봐.


이렇게 말하고는 욕과 비난의 말을 야구방망이로 나를 두들겨 패듯 쏟아냈다. 나는 너무 당황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욕을 하고 있다. 누군가가 나를 비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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