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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제나봄 Jul 14. 2021

아마도 곧 그리워 하게 될 고립의 순간들

코로나 시대의 낭만적 허영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잔뜩 흐린 오후, 엷은 흰색 커튼 사이로 걸러진 햇살은 거실 끝 쪽만 간신히 밝힐 정도로 힘이 없다. 선선하게 돌아가는 에어컨과 선풍기, 식탁 위로만 쏟아지는 둥근 주황빛 불빛, 화려한 빛깔과 무늬의 리넨 드레스를 입고 어두컴컴한 탁자 한편에 기대 달큰한 칵테일을 한 잔 해야 어울릴 것만 같은 재즈 트리오의 음악이 이어지는, 눈을 감으면 어디선가 파도 소리도 들려올 것만 같은 이곳, 우리 집 거실이다.


나도 모르게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떠 본다. 등 뒤에선 재택근무 중인 남편의 손가락이 노트북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며 내는 타닥타닥 소리가, 저 멀리 아이 방에선 쏴르르 쏴르르 레고 블록을 헤치는 소리가 먼바다의 파도 소리처럼 들려온다. 가만히 리클라이너 의자를 뒤로 젖히며 좋아하는 작가가 최근에 발표한 보라색 수필집을 집어 든다. 모두가 함께 있지만 또 각자의 삶을 충만히, 그리고 충실히 채워가는 지금 이 순간. 아, 행복하다.


한 때 잠시 지나는 유행이겠거니 했던 감염병 사태는 2년 차에 접어들었고, 그래도 한동안은 마스크로 얼굴을 절반씩 가려야만 하는 걸 빼면 그럭저럭 일상의 평온함을 되찾아 가는 듯했는데, 또다시 시작이다. 학교가 문을 닫아 아이는 원격 수업을 시작했고 남편 또한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이 무렵이면 집 근처 학교에서 교복 입은 학생들이 웅성웅성 재잘재잘 쏟아져 나오곤 했는데, 텅 비어버린 버스 정류장엔 뜨겁고 습한 공기만 가득하다. 간간이 집에서 커피 한 잔을 나누던 이웃들과도 오가기 어색하고 조심스러워진 요즘,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 또다시 고립이 시작되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로 다시 들어가는 길목처럼, 열기만 머금은 채 비를 쏟아붓지도 못하는 두터운 회색 구름처럼, 한숨으로 가득한 일상이 예고되었다.


문을 걸어 잠근  아이도 남편도 나가지 않는,  식구가 하루를 온종일 함께 하는 날들이 이어진다. 하루에도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소식이 끊이지 않지만, 이곳은 마치 외부 세계와는 온전히 독립되어 있는 하나의 우주와도 같이 고요하고 안전하며 평온하다.  시간 동안은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각자가 하고픈, 혹은 해야  일들을 가만히 해내다가도, 잠시 쉬고 싶어 기지개를 켜는 아빠의 숨소리에  멀리서 아이가 화들짝 기뻐하며 달려 나와 안길 때면 집안은 금세 꺄르르 웃음소리로 가득 찬다. 어느새 아기 티를 벗어버린 아이는 엄마 아빠  속에선 여전히 아기 같아서 아빠 등에 올라타 말타기 놀이를 하기도 하고, 가만히 다가와 엄마 품에 스르르 녹아들듯 안겨서 아기처럼 자장노래를 불러달라 어리광을 피우기도 한다. 평상시였다면 아마도 늦은 밤에나 잠시 누렸을  일상의 행복이, 역설적이게도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것과 거리가  사태 덕분에 하루의 모든 순간으로 확장되었다. 어쩌면 나는,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으로 가득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으로부터 유리되고 고립된  곳은 사실은 우리만이 누리고 간직할  있는 완벽하고 온전한 시간과 공간이기에. 어쩌면 지금  순간, 바로  곳이 우리가 그토록 닿고 싶었던 꿈이자 이상이자 세계였기에.


남편은 종종 아이가 아직 어리고 예쁜 이 시기에 한 해 정도 안식년을 가지고 오롯이 함께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회사에 몸이 매인 직장인이 막연한 꿈처럼 생각만 할 수 있던 일이 현실로 쿵 떨어져 버린 지금, 비록 우리가 꿈꾸던 대로 파리 센 강변을 거닐지도, 자다르의 해변에서 노을을 즐기지도 못하지만, 이렇게 온종일 한 공간에서 서로의 모든 일상을 함께 할 수 있는 날들이 주어졌다는 건, 어느샌가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일상이라는 게 회복된 그 순간에 다시금 무척이나 그리워하게 될 순간들이 아닐까 하는 낭만적인 허영을 부려본다. 아마도 나는 이 시기의 나를, 우리를 무척이나 그리워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저만치 흘러가버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아쉬워 조금은 울컥할지도. 서로를 온전하게 사랑하고 아끼며, 우리 셋만 있다면 이 단절되고 고립된 시기도 아름답고 행복하다 감사하며 충만한 기분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바로 이 순간들을 말이다. 흘러가는 순간들이야 붙잡을 길이 없으니 배경처럼 음악만 흐르고 있는 이 공기를 가르고 나가 두 사람을 꽉 끌어안아주어야겠다.


자다르의 노을로 뛰어들던 다섯 살의 봄, 파리의 크리스마스를 만끽하던 여섯 살의 봄. 다시 가 닿을 수 없기에 늘 그리워 하는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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