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rae Dec 29. 2023

류이치사카모토 오퍼스

사랑의 결핍

흑백의 화면에 백발의 피아니스트의 뒷모습이 보인다. 차분하게 연주를 하는 그의 흰 머릿결이 빛을 받아 더 밝게 빛난다.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 영화에서 처음 나오는 노래는 어떤 곡인지 나오지 않아서 피아노의 소리만을 들었다. 천천히 울려 퍼지는 곡을 눈으로, 귀로 듣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난다. 울면서 보려고 작정한 영화처럼 눈에서 두세 갈래로 눈물이 흐른다. 이 음악은 뭘까. 영화를 다 보고 집에 와서 찾아보니 제목이 lack of love이다. 내가 왜 그리 눈물을 흘렸는지 제목을 보니 짐작이 된다.


오늘은 이번 연도의 마지막 주다. 이번 한 해를 돌아보면 나는 정말 행복했다. 특히 9월 인도에서의 한 달 동안이 나에게 맞춘 천국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행복했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물건이 다르듯, 필요한 다정함의 결이 다르듯 인도의 북쪽 리시케시는 나에게 꼭 맞춘 행복한 동네였다. 작은 탐험을 좋아하는 나에게 인도의 좁다란 골목길은 늘 새로움의 대상이었고 또 새로운 느낌표를 발견하기도 했다. 인도 사람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강가는 나에게도 따뜻한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눈으로 물결을 바라보는 것, 손 끝으로 물의 온도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다녀오고 나서 더 많이 그리워했다. 헤어진 연인보다 더 그리워 눈물이 나기도 했다. 두 번이나 다녀왔는데도 뭐가 그리 좋은지 그만큼 나에게 그곳은 소중한 곳이었구나. 다녀오고 난 후에 더 깨닫게 된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영화는 류이치사카모토의 피아노 소리만이 영화관을 채운다. 다시 할게요. 잠깐 쉬었다 할게요. 하는 잠깐의 대화를 빼면 그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다. 첫 곡을 듣고 울다가 온몸을 감싸는 피아노 소리에 스르르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 다시 그의 연주를 듣고 또 잠에 빠졌다. 그리고 마지막 곡이 연주된다. 화면에 계속 있던 그는 없고 피아노가 저절로 연주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곤 그를 비추던 조명이 있던 장면에 그가 없다. 조명은 계속 피아노를 비추고 있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그가 화면 밖으로 퇴장함을 알 수 있다.


그가 피아노를 떠난 후에도 노랫소리는 계속 흘러온다. 그가 살아온 년도가 나온다. 23년 3월을 마지막으로 그는 이제 더 이상 피아노 앞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가 세상을 떠났어도 여전히 그의 음악은 영원히 존재할 것을.


lack of love를 다시 들으며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한 사람에게 사랑받는 것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인은 나에게 친구이자 형제이자 가족이자 집이자 유일한 단 하나의 존재였다. 사람은 하나인데 내가 너무 많은 모습을 바라서 버거워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도 나는 나의 욕심을 내려놓지 못했다. 사랑이 끝나고 혼자 남게 되었을 때 혼란스러웠고 모든 것이 어둠을 향했다. 빛의 반대편에 있는 감정을 알고 싶지 않아도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오랜 사랑이었다. 오랜 사랑이어서 바래져도 나는 계속 닦아내 더 함께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혼자만의 것이 아니기에 나의 마음대로 되는 것은 없었다.


그 후로 모든 것들이 힘이 쭉 빠져버렸다. 일상도, 일도, 그 무엇도 무미건조했다. 표정 없는 사람처럼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하루를 겨우 살아냈다. 좋아서 시작했던 일도 이게 맞는 것인지 왜 힘든지 고민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가리워진 길을 혼자서 찾아내려고 하고 있었다. 외로운 직업이고 외로운 나날들이었다. 나에게 사랑을 주는 존재도, 느낄 수 있는 사랑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느끼지 못했던 것뿐이지 나를 봐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들은 늘 곁에 존재했다. 연말을 맞이해서 인사를 해주는 사람들의 글 속에 사랑이 담겨있다. 그 글을 읽고 있으면 그 사람들은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해 주는 사람들인 것 같이 느껴진다.


lack of love, 사랑의 결핍은 주위에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이 느끼지 못했던 것에 대한 것이다. 피아노를 치는 류이치사카모토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 눈물이 났던 이유는 그의 뒷모습에서 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곁에 피아노만이 존재해도 그는 섬세하게 건반을 누르며 곡을 연주한다. 박자를 맞추느라 손을 휘젓기도 하고 표정으로 음악을 느끼기도 한다. 나에게 소중했던 존재가 떠나갔어도 내 앞엔 여전히 다른 존재들이 있다. 내가 여전히 사랑하는 존재들이 있기에 또 살아갈 수 있다.


내가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 나를 사랑해 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한 사람을 살릴 만큼의.

작가의 이전글 나의 숲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