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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적이어도 사업가 합니다

내향인인 내가 사업을 하게 된 이유

나는 내향인이다. 어렸을 때부터 나의 내성적인 기질은 남달랐다. 명절 때만 되면 친척들을 만나는 게 얼마나 고역이었는지 모른다. 앞에 나와 인사드리면 되는데 엄마 품 속에 숨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 친척뿐이랴, 집에 어른 누가 방문하기라도 하면 늘 현관문을 여는 건 엄마나 아빠였고, 나는 옷장이나 침대 밑에 숨어 있기 바빴다. 물론 자는 척도 빼놓을 수 없었다.



무서워서 배달을 못 시키겠다.

어렸을 때 엄마는 학습지 교사 일을 하셨다. 학교 다녀와서 엄마 없이 집에 있을 아이들이 안쓰러우셨나 보다. 방과 후 동생과 함께 집에 와 보면 TV 위에는 만 원짜리 한 장과 함께 쪽지가 놓여 있곤 했다. '아들, 딸, 엄마 오늘 조금 늦을 것 같으니까 저녁때 이걸로 치킨 시켜 먹어~'(여담이지만 그때는 후라이드 치킨 한 마리 배달 값이 9,700원인가 그랬다. 아, 물가여...)


물론 치킨을 먹을 수 있다는 기쁨이 샘솟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엄마 아빠 없이, 나 스스로 전화를 걸고 배달을 시켜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치킨을 기다리는 동생이 있으니 그냥 밥 먹자고 할 수도 없고… 하는 수 없이 전화기를 들며 벌벌 떨었던 기억이 난다.



안녕하세요, 치킨 먹을 건데요, 여기 주소는 OOO이고요, 한 마리인데요, 예, 현금으로 낼 거고요, 예, 거기 주소 맞아요, 예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랬다. 난 배달 전화조차 덜덜 떠는 확실한 내향인이었다. 나이 먹은 지금도 솔직히 배달 전화가 그리 편하지만은 않다. 그래서 아마 나와 같은 내향인들은 배민이나 요기요 같은 플랫폼 주문 서비스가 무척 반가웠을 것이다. 전화를 하지 않고도 배달주문이 가능하다니, 지금은 몰라도 아마 배민 초창기 매출의 상당 부분은 우리 내향인들이 책임지지 않았을까.



배민 초창기에는 '굳이 뭔 앱으로 시켜' 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내향인들에게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내향인으로서 내세울 수 있는 에피소드는 사실 그 외에도 셀 수 없이 많다. 유치원 가서 선생님께 직접 학비 봉투 내밀기가 쑥스러워서 학비도 밀려보고, 학창 시절에는 용기가 없어서 담임선생님과 거의 말도 못 했다. 친구 사귈 때는 어땠냐 하면, 먼저 '나랑 친구 하자' 이래 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 만나는 내 친구들 모두 공통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나한테 먼저 '친구 하자'라고 말해줬다는 것이었다.



네가 사업을 한다고, 네가?



그래서 나를 아는 지인들은 놀라워했다. '범생이', '공붓벌레', '부끄럼쟁이', '소심쟁이' 등 내성적인 이미지는 다 달고 있었던 내가 취업을 거부하고 나만의 길을 걷겠다고 했을 때 지인들은 내 말을 믿기 어렵다고 했다. 특히 나보다 먼저 사업을 하던 친구가 괘씸하게도 얼마나 코웃음을 쳤던지. 이제는 지인들이 나를 어엿한 사업가로 인정해 주지만 처음에만 해도 나는 자신을 '사업가'로 주변에 인식시키고자 얼마나 인정 투쟁을 벌였는지 모른다.



나, 사업가 한다(뭔가 겁나 멋지지 않냐? 친구들아?)



사실 나도 쉽게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나, 내향인이다. 얼마나 소심하고 겁이 많은지 아는가. 어렸을 때 TV 등 매스컴에서 누가 사업했다 망했다더라 하는 얘기만 주야장천 들어왔기에 더더욱 '사업 = 패가망신'이라는 고정관념이 굳건했던 나였다. 사업은 집안 말아먹는 주범이니, 아마 절대 하지 않을 것 같다고 어렸을 때 나는 막연히 다짐하곤 했었다.


그럼 왜 나는 사업을 하게 되었을까? 예전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려고', '진정 내 안의 열정을 좇아' 등 낭만스러운 이유를 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요즘 문득 생각하건대 어쩌면 정말 별거 아니었을지 모른다. 거창한 욕심이라기보다는 내향인이기에 내세울 수 있는 심플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존재감


외향인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데 적극적이다. 과감하고, 추진력도 있고, 사교성도 좋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 중에 늘 돋보이며 인기도 많다. 하지만 내향인인 나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앞에 나서는 일이 없어 인기를 시험받을 일조차 별로 없었다.



나도 인기 있는, 잘 나가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어.



이 생각만은 간절했다. 숫기도 없고 용기도 없어서 맨날 조용히 있었지만 그럼에도 언젠가는 저 외향인들처럼 분위기를 리드하며 주목받는 모습을 꿈꾸곤 했다. 신중한 내향인이었던 나는 곰곰이 현실적인 방법을 생각해 봤다. '공부'. 그래. 내가 그나마 잘할 수 있는 것, 내가 돋보일 수 있는 방법은 학교 복도에 석차 대자보가 걸리는 순간뿐이야..! 


그래서 나는 열심히 공부를 했다. 내향인인 내가 가장 잘하는 건 가만히 앉아서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열심히 받아 적고, 외우란대로 외우고, 시험 잘 보라니까 열심히 노력해서 시험 잘 보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좋은 성적을 받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친구들은 나의 우수한 성적을 인정해 주기 시작했다. 어쩌다 '반장'까지 꿰차게 됐다. 공부를 잘하니까 드디어 내게도 '존재감'이 생긴 것이었다.



사실 사업을 결심했던 이유도 비슷했다.

좋은 성적으로 괜찮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나처럼 공부 잘했던 친구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심지어 공부도 잘했으면서 인기 많고 잘 나갔던 외향인들도 많은 것이 아닌가..! 대학 신입생이던 나는 이제 온 데 간 데 없어진 '존재감'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한 학기, 존재감도 없이 자신을 잃고 축 늘어져 있었던 나는 2학기에 접어들면서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과감하게 학회장 선거에도 나가보고, 댄스경연대회에도 나갔다. 연애해보겠다고 엄마가 사다 주는 옷만 입던 내가 패션 매장에도 갔다. 그리고 정말 어이없는 것이긴 한데, 존재감을 얻기 위한 나의 여정은 '심리학'을 만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정말 단순한 이유였다. 내 주변에는 '심리학'을 고르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학년이 되면서 취업에 대한 부담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존재감'을 추구하던, 그래서 어떻게든 튀고 싶었던 관성 때문이었을까. 나는 취업을 마다하고 냅다 대학원에 입시 원서를 때려 넣고 말았다. '나만의 전문성을 갖고 싶어', '나만의 영역이 필요해'라는 그런 이유로. 


그리고 대학원을 마칠 때, 지도교수님의 취업 제안마저도 뿌리치는 사고(?)까지 쳐버렸다. '이젠 내 일을 해보고 싶어', '나만 할 수 있는, 그런 반짝반짝 존재감으로 빛나는 수많은 일들을' 이런 생각을 하며 말이다. 이렇게 보면 존재감이라는 게 정말 뭔지. 그 소심하던 내향인을 이끌고 여기까지 오게 만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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