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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가 나쁘기만 한 건 아닙니다

외상 후 성장 개념 소개

아, 트라우마 생길 것 같아



외상, 그보다는 영어 명칭인 트라우마trauma 라는 표현이 요즘은 더 익숙하게 느껴진다. 조금 오버하자면 '트라우마'의 시대처럼 느껴질 만큼 트라우마라는 단어가 무척 흔하게 통용되고 있는 것 같다. 원래 트라우마라는 것은 극단적인 스트레스 사건으로 인해 발생하는, 좀 무거운 개념이지만 요즘은 '자꾸 생각날 것 같다', '상처받았다', '기분이 좀 안 좋다' 할 때도 다 '트라우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트라우마의 개념은 대중사회에서 남용되고 있다. 하지만 마냥 부정적으로 보지만은 않는다. 과거에는 의지력, 정신력 문제로 치부되었던,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몰아가던 사회적 부조리들을 이제는 조금 더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트라우마가 아니었던 것들이 이제는 트라우마로 불리면서 각자 '조심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학계에서도 트라우마의 저변은 넓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전쟁, 강간, 자연재해 같은 엄청난 사건들 = 외상 경험 = 트라우마 유발로 여겨졌지만 연구가 지속되면서 트라우마는 점점 개인적인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다. 쉽게 말하면 남들이 보기에 아무리 시시할 것 같은 사건이더라도, 당사자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하다면 충분히 트라우마 경험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접촉 사고, 시체 목격, 중요한 누군가의 투병, 이별 경험 등 일상에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 곧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트라우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뭘까? 아마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PTS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존재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PTSD를 겪는 사람들은 트라우마가 되는 사건 기억이 자꾸 머릿속을 헤집고(기억 침습), 마치 어제의 일인 듯 생생하게 다시 떠올리고(플래시백), 조금이라도 트라우마와 관련된 자극이 있을 경우 회피하고, 정상적인 반응을 할 수 없으며, 지속적으로 과하게 긴장하는(과각성) 등의 증상을 겪는다.


물론 이것뿐만은 아니다. 불안, 우울, 충동성, 알코올 중독, 수면제 과다 복용, 성격의 변화, 죄책감, 대인관계의 손상, 무력감, 현실 지각력의 저하, 업무 부적응 등 다양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 심리학자들의 설명이다. 그야말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온갖 부정적인 심리 상태의 총집합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렇게 나쁘기만 할 것 같은 트라우마 경험이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심리학자들은 트라우마 사건 이후, 스트레스 장애로 넘어가는 대신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PTG)이라고 불리는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주의해야 할 점은 외상 후 성장은 단순히 '잘 견디는 것' 그 이상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외상 후 성장을 겪는 사람은 트라우마 사건에 저항하고 자신을 잘 보호하는 한편, 그 이상으로 더 나아진 삶의 질적 대 변환을 경험하게 된다. 성장으로 말미암아 전보다 더 행복하고 값진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외상 후 성장은 트라우마 사건의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암 환자이든, 성범죄 피해자이든, 전쟁 피해자이든, 재난 생존자이든 그 누구라도 외상 경험 이후 극정인 성장을 경험할 수 있다. 으레 트라우마 경험이 너무 가혹하면 성장이 일어나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아무리 심각한 트라우마 사건을 경험했더라도 외상 후 성장을 경험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면 외상 후 성장을 겪는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다를까?



첫째, 자기 지각의 변화changed perception of self이다. '내게 이런 면이 있었어?', '그래도 잘 견뎌냈구나', '내가 왜 미처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성장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트라우마 경험을 통해, 기존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의 새로운 면면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트라우마를 견딘 이후 전에 없던 자신감이 샘솟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이런 끔찍한 일도 견뎌냈는데, 살면서 그보다 더한 일이 얼마나 있겠어', '이까짓 것쯤이야, 내가 예전에 겪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대인관계의 변화이다. 트라우마 경험은 주변의 지지와 공감, 연민 등을 유발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타인에 대해 무한한 감사gratitude를 느낌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서로 연대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일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셋째, 인생관의 변화이다. 예전에는 돈이 최고인 줄 알았건만, 그저 커리어가 장땡인 줄만 알고 가족들을 등한시해 왔는데 트라우마 사건을 경험하고 나니 이제야 무엇이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했던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는 사람들이 많다. 외상 후 성장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이전에는 거들떠도 안 보았던, 가족이나 소중한 지인들, 봉사, 배려, 감사하는 삶, 종교적인 자세 등에 비약적으로 높은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참고로 심리학에는 스크루지 효과Scrooge effect 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 또한 트라우마 사건 이후의 긍정적인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스크루지 효과란 자신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경험한 사람이 이타적인 태도를 갖게 되는 경향을 의미하는데,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 속 주인공 스크루지 영감이 끔찍한 악몽(트라우마 경험)을 꾸고 나서 지독한 구두쇠에서 인자하고 선한 사람으로 변모한 것을 빗대어 붙여진 이름이다.



외상 후 성장으로 나아가는 방법



트라우마는 불가피하다. 의식적으로 막는다고 해서 막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트라우마 사건 자체를 예방하려는 노력보다는 트라우마 사건이 닥쳤을 때,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의미화meaning 하느냐가 PTSD로 가느냐, PTG로 가느냐를 결정짓는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트라우마 사건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반추'를 경험한다. 아무리 밀어내려 해도 그날의 기억이 자꾸 떠오르고 재생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러한 반추 경험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역설적으로 반추 경험이야말로 외상 후 성장으로 안내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지속적으로 그날의 사건을 곱씹으면서,


내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을지, 없었을지

주변의 도움은 어떠했는지, 도움받은 내용은 뭐였는지

사건 이후 내가 어떻게 물리적/정신적으로 대처했는지

그 당시 내 감정과 마음가짐은 어땠는지

내가 다시 일어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결국 이 사건이 내게 남긴 교훈은 뭔지


평소라면 하지 못할, 많은 시간을 들여 사건, 더 나아가 인생을 충분히 되새기고, 또 되새기며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귀한 계기로 삼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 감당 가능한 수준이 아닌 다음에야, 밀려 들어오는 기억들을 일부러 회피할 필요는 없다. 그 안에서 어떤 의미와 기억을 남기는가가 성장이냐, 좌절이냐를 결정하게 될 테니 말이다. 단, 트라우마 사건을 재경험하면서 자기 비난으로 빠지는 상황만은 경계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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